<조선왕조실록(59> 선조 7 - 연전연패
부산이 함락되기까지 입은 왜군 피해는 전사 100여 명, 부상 400여 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이 정도의 항전도 그나마 거기까지였습니다.
경상 좌병사와 경상 좌수사는 왜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성과 무기를 버리고 도망쳤고, 경상 우수사 원균은 배를 바다 속에 밀어 넣고 도망을 쳤습니다.
왜군은 실제적 전투경험에다 조총으로 무장까지 했고, 정보전에 전술전략까지 완벽했으니, 오합지졸 조선군이 이들을 이길 도리가 없었습니다.
부산에 속속 상륙한 5만의 왜군 선봉대는 세 갈레로 나누어 파죽지세로 북상을 계속했습니다.
한편, 일본의 침략소식은 나흘 뒤인 4월 17일 조정에 전해졌습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선조는 유성룡, 신립, 이일 등을 주요 자리에 임명하고 적의 북상을 저지토록 하였습니다.
이 당시 조선의 방어체제는 제승방략제, 즉 각 고을의 군사가 약속한 장소에 모여 대군을 이루고는 중앙에서 보낸 장수의 지휘를 받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경상감사 김수가 대구 들판에 각 고을의 군대를 모아 진을 치게 했으나, 훈련 한 번 받아 본 일 없는 오합지졸 군대는 하나 둘 흩어지기 시작해 순변사 이일이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거의 와해되고 깃발만 나부끼는 형국이었습니다.
이일은 적정탐지라는 기초적인 작업도 할 줄 몰랐고, 적이 코앞에 온 것도 모른 채 우왕좌왕하다가 적의 습격을 받아 저항도 못해 본 채, 군관 한 명 노복 한 명과 함께 도망쳐 당시 조선 최고의 명장이라는 신립장군의 군진으로 들어갔고, 병사들은 당연히 몰살되었습니다.
신립은 당시 당대 최고의 장군이라는 명성을 갖고 있던 자로, 기병싸움의 달인이라는 평을 들었습니다. 조정은 신립장군이라면 왜군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였습니다.
조정이 기대를 한 몸에 받은 신립은 “적이 많고 강하니 험준한 요새인 조령을 지키며 싸우자”는 휘하 장수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기병을 활용한 싸움방식을 선택했습니다.
신립은 충주 탄금대에 강을 등지고 진을 치는 방식, 즉 배수의 진을 치고 왜적과 맞섰으나, 이곳은 논밭이 많아 말을 달릴 수 없는 곳인데다 비까지 오니, 기마병은 진흙탕에 빠져 허우적거렸고, 왜군 조총부대의 쉬운 과녁이 되고 말았습니다.
조선 최강 부대라는 신립부대는 이렇게 힘 한 번 못쓰고 박살이 났고, 신립은 강물에 몸을 던졌습니다.
배수에 진을 친것은 결심에 대한 표시이나, 패하고 나면 전멸이고 자타가 인정한 명장 신립도 부하의 의견을 듣지도 아니하고 자기 주장만 앞세우다 전멸하니 죄없는 병사들만 죽어나가고 나라와 백성들은 어찌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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