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81)> 광해 5 - 광해의 외교 마인드

이찬조 2021. 4. 21. 20:42

<조선왕조실록(81)> 광해 5 - 광해의 외교 마인드

중원의 지배자 명나라가 만력황제의 방탕, 조선 파병으로 인한 국력손실 등으로 쇠락해가고 있던 즈음, 명의 지배를 받고 있던 여진족의 누르하치가 급격히 힘을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만주의 대영웅 누르하치는 8기제 등 강력한 전술 전략을 바탕으로 인근 부족을 통일하고 1616년 대금(후금)을 건국한 후 1618년에는 명나라에 선전포고를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명나라는 조선에 구원 파병을 요청해 왔는데, 당시 조선 사대부들의 생각은 “천자의 나라, 아버지의 나라에서 도움을 요청할 땐 죽어도 응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광해는 누르하치의 기세가 오히려 명나라를 압도한다고 보고 명나라의 요구에 신중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습니다.

그러나, 조정의 거의 모든 신료들은 “중국 조정에 죄를 짓기보다는 차라리 전하께 죄를 얻는 게 낫다”는 표현을 할 정도로 파병에 응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습니다.

결국 광해는 명나라의 요구대로 1만 3천 명의 군사를 모아 강홍립을 도원수로 삼아 압록강을 건너도록 하였습니다.

조명 연합군은 심하에서 누루하치의 대군과 맞섰으나 대패하였고, 강홍립의 군대 역시 후금 군대에 포위되어 괴멸의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그러나 후금은 명나라 정벌을 앞두고 조선과 끝까지 싸울 필요가 없다고 보고 강홍립에게 투항할 것을 권유했고, 결국 강홍립은 군사를 이끌고 후금에 투항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선 조정에서는 오랑캐에 투항한 강홍립의 처자를 구금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었으나, 광해는 이를 반대하고, 오히려 더 나아가 강홍립을 통해 후금에 적대할 의사가 없음을 밝히기까지 하였습니다.

광해의 의사를 확인한 누루하치는 조선에 화친을 요구하는 사신을 보내기에 이르렀는데, 이번에도 조정의 신하들은 하나 같이 다음과 같은 논리로 화친을 거부하여야 한다며 광해를 강하게 압박하였습니다.
- 범같은 기세의 오랑캐 기병이 쳐들어온다면 막을 방도는 없으나 부모와도 같은 명나라의 원수인 저들과 어찌 화친하겠나이까. 이것이 차라리 나라가 무너질지언정 차마 대의를 저버리지 못하는 이유이옵니다.(나라가 망해도 화친은 안 된다?) 여러분이 임금 { 즉 왕 } 이었다면 나라의존폐앞에서 과연 어느쪽을 선택했을까요?

광해가 신하들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자 비변사의 신하들은 태업을 하였고, 영의정 박승종은 아예 칭병을 이유로 집에 틀어박히는 등 광해의 외교정책을 정면으로 거부하였습니다.

광해가 여러 차례 옥사를 일으켜 수많은 사람을 역도로 몰아 죽이는 등 공포정치를 펼쳤고, 신하들은 언제 옥사에 내몰릴지 전전긍긍하며 공포에 떨었지만, 그러한 죽음의 공포마저도 “사대주의”라는 완고한 도그마만은 넘어서지 못했으니, 이들의 콘크리트보다 단단한 대뇌구조는 참으로 연구대상이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