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83)> 인조 1- 인조 등극과 치욕의 예후

이찬조 2021. 5. 4. 05:38

<조선왕조실록(83)> 인조 1
- 인조 등극과 치욕의 예후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오른 인조는 태종이나 세조와 같은 반정의 완전 주역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중종과 같이 반정 세력에 의해 왕위에 앉혀진 것도 아니었으므로, 나름대로 주관을 가지고 국정을 운영할 여건은 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인조는 반정이 서인 정권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을 잘 알았고, 붕당의 폐해 역시 잘 알았기에, “당이란 말은 주자의 말이라 해도 듣고 싶지 않소”라고 하며 붕당의 활개를 허용하지 않았고, 특정인에게 권력이 쏠리는 것도 늘 경계했습니다.

또한 반정의 첫 번째 명분인 사대의 예를 지키기 위해 친명배금정책을 천명하였습니다.

그러나 강하게 휘몰아치는 대륙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에 약소국의 "정책"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약한 자의 눈치 보기에 불과하였으니, 이는 만고의 진리라 하겠습니다.

왜란이 끝난 지 반 세기도 지나지 않은 1620년경의 약소국 조선은 또 다시 고통과 치욕의 길로 서서히 들어서고 있었습니다.

인조 반정이 벌어지기 2년 전인 1621년 요동 땅이 만주의 대영웅 누르하치가 이끄는 후금에 넘어가면서, 명나라 요양성 장수 모문룡이 조선 땅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모문룡은 의주 일대에서 후금 군에 의해 변발을 하게 된 명나라 한족들을 모아 후금의 발꿈치를 문 정도의 작은 전과를 올린 후 이를 과장해 본국에 보고하니, 명나라 조정은 모문룡에게 승진과 두둑한 상을 내렸습니다.

모문룡은 후금이 보복에 나서면 도망을 쳤고, 후금이 물러가면 다시 또 싸움을 걸어가니, 당시 광해는 조선 땅에서 후금과 감정적으로 싸우는 모문룡으로 인해 조선이 피해를 입게 될까 크게 걱정하였습니다.

이에 광해는 모문룡을 명나라로 돌려보내고자 했으나 실패하자, 모문룡을 가도(국경 근처의 조선 섬)에 들어가도록 했습니다.

요동의 명나라 한족들을 데리고 가도로 들어간 모문룡은 이내 가도의 기막힌 가치를 알아차리고, 진을 설치해 장기 주둔을 할 태세를 취하였습니다.

작은 섬 가도에는 수십만의 명나라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이들은 흉년이 닥쳐 식량 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을 경우 상륙해 약탈을 일삼았으며, 심지어 조선의 관아를 쳐 창고의 곡식을 털어가기도 하였습니다.

여기에 더 큰 문제는 사기가 오른 모문룡이 툭하면 요동을 점령한 후금을 공격할 액션을 취하여 후금을 자극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아무리 친명배금 정책을 선택한 조선이라 해도 부담스럽기 그지없는 일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