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82)> 광해 6 - 광해의 몰락, 인조반정!

이찬조 2021. 4. 21. 20:45

<조선왕조실록(82)> 광해 6 - 광해의 몰락, 인조반정!

광해가 반정에 의해 끌려내려 간 배경과 원인은 무엇일까요

실록에 나타난 반정 당사자들의 명분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 첫째, 배은망덕하여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었다.
- 둘째, 민가 수천을 철거하고 무리한 궁궐 증축을 하여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하였다.
- 셋째, 동생을 죽이고 어머니를 폐한 폐륜을 저질렀다.

그러나 중립외교에 관한 부분은 논란이 되기는 했으나 결국 크게 벌어진 결과물은 없다 할 것이고, 무리한 궁궐 증축이 있기는 했으나 이러한 정도의 공사는 다른 왕도 많이 추진했던 것이었으며, 또한 패륜으로 치면 태종 이방원이나 세조가 더하면 더 했지 못할 것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보면, 인조반정 주도자들의 명분은 그야말로 명분에 불과한 것이고, 반정의 실제적 원인은 전형적 권력투쟁과 능양군의 원한에 기인한 권력의지가 맞물린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겠습니다.

선조는 14명의 아들을 두었으나 늙어서 얻은 영창대군 외에는 모두 후궁의 소생이었습니다.

그 중 다섯째 아들이 정원군이었는데, 셋째 아들인 능창대군이 17세의 나이에 역모로 몰려 죽임을 당하자 몸과 마음이 상하여 시름시름 앓다 40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또한 광해가 정원군의 집에 왕기가 서려 있다는 점쟁이의 말을 믿고 그 집을 헐고 경덕궁을 짓기까지 하자, 정원군의 큰아들 능양군은 광해를 원수로 알고 광해를 몰아낼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능양군은 이귀, 신경진, 최명길, 김자점 등과 손을 잡고 3년여를 준비하였으며, 궐 안을 관장하는 훈련대장 이홍립까지 끌어들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반정 준비 기간이 길어짐에 따라 반정에 관한 사항이 새어나가게 되었으나, 이즈음의 광해는 그동안의 지나친 역모 고변과 옥사로 인해 역모에 대한 면역성이 강해져, 정세를 제대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소실된 상태였습니다.(반정 당일에도 거사 상소가 있었으나 광해는 이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1623년 3월 12일(광해 15년) 능양군이 이끄는 반란군은 큰 어려움 없이 대궐을 접수하였고, 그 날로 광해는 폐위되었으며, 능양군이 인목대비의 허락을 받아 왕위에 오르니 이 사람이 바로 인조입니다.

인조반정 후 광해의 사랑을 받던 김개시는 즉시 목이 잘려 나갔고, 광해의 아들과 며느리는 목메어 세상을 하직했으나, 정작 광해는 무려 19년을 유배지에서 더 살다가 67세의 나이에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파란만장한 생을 살다간 광해, 15년 세자 생활의 아픈 경험으로부터 조금만 자유로웠다면 훌륭한 임금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나, 결국 스스로를 극복하지 못하고 폭군에 폐위에까지 이르렀으니, 누구를 탓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