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86)> 인조 4 - 병자호란(2)
청군의 급속 남진으로 인해 강화로 가지 못한 인조 일행은 부득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는데, 곧 청군이 쫒아와 눈보라 치는 남한산성을 에워쌌습니다.
남한산성 안의 조선 조정은 죽기로 싸워야 한다는 의견과 화친하여야 한다는 의견이 맞선 가운데 청군과 굴욕적인 물밑 교섭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청나라 진영을 찾은 조선측 대표 박난영의 목이 잘리기도 했습니다)
남한산성 안의 조선 조정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두려움과 공포에 떨며 갈팡질팡 하던 중 청나라 태종이 직접 남한산성까지 내려오게 되니, 조선 조정은 작은 계책으로는 위기를 벗어날 수는 없는 중대한 국면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해가 바뀐 1637년 1월 1일, 이 와중에도 조선 조정은 모두 꿇어 앉아 중화 대국 명나라 황제의 만수무강을 위한 망궐례를 올렸고, 이날 청 태종은 청군 진에 도착해 높은 곳에 올라 조선의 망궐례 의식 모습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눈보라가 몹시도 휘날리던 1637년 1월 17일, 청태종은 드디어 다음과 같은 글을 인조에게 보내왔습니다.
- 정녕 그대가 살고 싶거든 빨리 성에서 나와 귀순하고, 죽고 싶거든 또한 속히 일전을 벌이도록 하라.
조선 조정은 화친하자는 의견을 펴 온 최명길이 답서를 했는데, 신하들은 “왕이 성을 나가고도 임금이 보전된 경우는 없습니다. 그 때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입니다”라고 하며 최명길을 강하게 비난하였습니다.(그럼 어쩌라고!)
결국 왕이 성을 나가는 것만은 면하게 해 달라는 내용이 담긴 최명길 초안의 국서가 청군에 보내졌고,
청군에서는 “황제가 이미 이곳에 온 이상 조선 국왕이 성 밖으로 나오지 않을 수 없고, 더불어 척화를 주장한 신하 몇을 묶어 보내지 않을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밝혔습니다.
조선 조정이 이 문제로 또 다시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던 때에 용골대가 최후통첩을 했습니다.
- 황제께서 내일 돌아갈 예정이니, 우리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면 다시는 사신을 보내지 마라. 추후에 남는 것은 조선의 멸망뿐이다.
그러면서 용골대는 봉림대군과 비빈 등이 피신해 있던 강화도가 함락되어 쑥대밭이 되었으며(살아남은 자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봉림대군과 인조의 비빈 등을 청태종의 동생 도르곤이 잡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결국 조선 조정은 모두 울며 불며 다음과 같이 인조에게 간하였습니다.
- 성상께서 성에서 나가시면 보존될 확률이 반반이지만, 나가지 않을 시엔 열이면 열 망하고 말 것이옵니다 저언하!
삼전도의 굴욕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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