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87)> 인조 5 - 병자호란(3)

이찬조 2021. 5. 4. 05:41

<조선왕조실록(87)> 인조 5 - 병자호란(3)

나라를 완전히 멸해버리겠다는 최후통첩에, 조선 조정은 1월 27일 청 태종에게 마지막 국서를 보냈습니다.
- 삼가 바라옵건대 성자께서는 뜻을 분명히 밝히시어 신이 안심하고 귀순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조선의 국서를 받은 청 태종은 조선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하는 서신을 보내왔습니다.
- 그대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는데 짐이 다시 살아나게 해 주었으니 그 은혜를 생각하라. 그 은혜를 생각해 자자손손 신의를 어기지 않는다면 그대 나라가 영원히 안정될 것이다.
- 청과 조선은 군신의 예로 대하고 조선은 명과 단교한다.
- 장자 등을 인질로 삼는다.(등등등등등등...)

삼전도에 항복식을 거행할 단을 쌓은 청은 몸을 결박하고 관을 끌고 나오는 만주식 예를 면제해주겠다는 큰 인심(!)을 썼고, 다만 죄인인 국왕이 정문인 남문으로 나올 수 없다는 등의 몇 가지 항복식과 관계된 요구사항을 전달하였습니다.

1637년 1월 30일, 마침내 인조는 통곡하는 백성들을 뒤로 한 채 정문이 아닌 서문을 통해 남한산성을 나서 송파구 삼정동에 위치한 삼전도에 이르렀습니다.

인조는 “천은이 망극하옵니다”를 외치며, 청나라식 항복의 예인 삼배구고두(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땅에 머리를 소리가 나도록 부딪혀 조아리는 의식)의 예를 올리며, 항복의 예를 갖추었습니다.

항복식을 마친 인조는 용골대의 호위를 받으며 도성으로 돌아왔습니다. 도성 거리엔 청나라 그리고 함께 온 몽고 병사들이 넘쳤고, 가옥은 불타고 있었으며, 시체들이 곳곳에 널려 있었습니다.

청 태종이 돌아가자 곧 인조의 큰아들 소현세자, 둘째 봉림대군 등도 통곡 속에 인질로 청나라로 떠났습니다.

또한 삼전도에 청 태종의 공덕을 찬양하고 항복을 기념하는 거대한 비가 세워졌고, 척화신으로 끌려간 윤집, 오달제, 홍익한(3학사)는 목이 잘리어 나갔습니다.

또, 청군이 포로로 끌고 간 조선인이 수만에 이르렀습니다.(수만에서 수십만이라는 기록까지 있음)

그런데 이들이 목숨을 걸고 도망쳐 오더라도 조선은 이들을 잡아 다시 보내야만 했고, 따라서 이들이 돌아올 수 있는 길은 속환, 즉 돈을 주고 사오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붙잡혀 간 사람을 데려오는 속환 금액은 갈수록 천정부지로 뛰어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시도를 하지 못했고, 더 한 문제는 끌려갔다 우여곡절 끝에 돌아온 부녀자들의 문제였습니다.

자기 부인도 지키지 못한 주제에, 조선 사대부들은 돌아온 부인의 몸이 더렵혀졌다는 이유로 나라에 이혼을 허용해 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인조는 사대부들의 이혼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실제로는 이런 저런 다른 이유를 달아 어렵게 돌아온 부녀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보다 못한 조정에서는 이 여인들로 하여금 냇물(홍제천)에 몸을 씻게 하고 그들의 정절을 회복시켜 주는 의식을 거행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 시대 여인들의 수난사는 차마 글로 옮기지 못할 지경이라 하겠습니다.
(젠장인지 된장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