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84)> 인조 2 - 정묘호란

이찬조 2021. 5. 4. 05:39

<조선왕조실록(84)> 인조 2 - 정묘호란

이즈음 후금에선 중대한 정세 변화가 있었으니 만주의 대영웅 누르하치가 1626년 숨을 거두고 평소 조선정벌을 주장하던 8남 홍타이지가 새 칸으로 선출된 것입니다.

홍타이지는 칸에 오르자마자 모문룡의 일 등을 명분삼아 사촌인 아민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1627년 1월(인조 5년) 3만의 군사로 조선을 정벌토록 하였습니다.

후금의 막강한 전력 앞에 조선의 방어선이 속속 무너지자 인조는 강화도로 파천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왜란이 끝난 지 30여년 만에 이번엔 여진족에 의해 또 다시 조정이 피난을 가는 참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정묘호란입니다.

후금 총사령관 아민은 3만의 병력으로 조선의 완전 항복을 받아내기에는 부족하다고 보고, 한양으로 내려오면서 조선과 협상을 시도하였습니다.

후금은 조선에 명과 단교하고 양국이 형제(물론 후금이 형)의 나라로 지내는데 동의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조선은 후금과의 화친은 가능하나 명과의 단교는 어렵다는 답신을 보냈고, 후금은 명과의 단교는 하지 않지 않고 양국이 화친하되, 그 맹세로 백마와 흑우를 잡고 피와 골을 함께 마시는 만주식 의식을 갖자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왕이 오랑캐인 여진족과 위와 같은 의식을 거행하는 것은 지나치게 야만스러워 선비의 나라인 조선에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에 우여곡절을 거친 후 인조가 모후의 상중에 있음을 핑계로 선조는 향불을 태우는 의맹식을 거행하고, 백마와 흑우를 잡고 피와 골을 마시는 의식은 신하가 대신하는 방식으로 겨우 겨우 화친을 하게 되었습니다.

친명배금이니 뭐니 해 봤자 결국 힘 앞에는 별 도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화친이 되기까지 그리고 화친이 된 후 후금 군사들에 의해 조선 백성이 얼마나 많이 죽었고, 얼마나 수난을 당했는지는 왜란 편에서 충분히 본 것과 다를 것이 없으므로 생략하고자 합니다.

후금은 완전 철수를 하면서 칸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의 국서를 보내왔습니다.
- 조선 국왕이 하늘의 뜻을 알아 허물을 즉시 뉘우치고 화친을 이루게 했으니 두 나라는 영원히 형제의 우애로 지내야 할 것이다.
- 그리고 포로로 잡혀 온 고려인이 조선으로 도망치면 즉시 붙잡아 보내야 할 것이다.

조선은 조선인이 도망쳐 올 경우 가급적 모른 척 했지만, 항의가 거셀 경우 부득이 몇 명이라도 잡아 다시 후금에 넘길 수밖에 없었고(나라가 아니라 왠수다 왠수!), 조선 사신이 심양에 가면 수많은 조선인이 몰려와 통곡하며 데려라 주기를 호소하곤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