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85)> 인조 3 - 병자호란(1)
정묘년의 치욕을 당한지 얼마되지 않아, 인조는 자기 아버지인 정원군을 왕으로 추승하여 명국의 승인까지 받게 되자, 갑자기 자신감이 생겼는지 후금에 대한 복수와 배척의 뜻을 공공연히 드러내기 시작하였습니다.
조선이 진정으로 정묘년의 치욕을 갚고자 한다면, 왕실이나 종친, 훈신들 나아가 양반들이 가진 갖가지 특전을 버리고 재정을 확충한 다음 민심을 수습하고, 무기를 장만하는 한편 군대를 모아 훈련을 시키는 등 야무진 각오와 준비를 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인조와 중신들은 “소중화”라는 관념과 대의에만 빠져 숨가쁘게 돌아가는 주변 정세에 대한 면밀한 검토는 물론이요 실질적인 준비도 전혀 없이 나라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소중화사상(小中華思想)은 중국 이외의 나라에서 중화사상의 영향을 받아 발달한 문화 사대주의 사상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뼛속까지 뙤놈을 상전으로 모시겠다는것이지요~
그건 글코~ 어쨌든 후금은 이즈음 중국 공략을 잠시 멈추고 서쪽과 몽고족 정벌에 나서 큰 성과를 거두었고, 드디어 홍타이지는 스스로 황제가 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었습니다.
1636년(인조 14년) 후금의 사신 용골대가 사신으로 와 홍타이지가 황제로 오르는 일에 협조할 것을 요구하자, 조선은 강력히 반발하며 이를 거부하였습니다.
“소중화”를 외치는 조선이 오랑캐의 황제 등극을 동의할 수는 없었겠지요. 다음은 이 때 인조가 반포한 척화교서의 일부입니다.
- 정묘년의 변을 당해 임시로 기미할 것을 허락했는데 오랑캐들의 요구는 한이 없더니, 요즘은 더욱 창궐하여 감히 참람된 칭호를 가지고 의논한다고 하니, 어찌 우리 군신이 차마 들을 수 있는 것이겠는가
- 이에 존망의 형세를 헤아리지 않고 한 결 같이 결단해 그들을 물리쳤으니, 충의로운 선비는 있는 책략을 다하고 용감한 사람들은 종군을 자원하여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라.
조선이 위와 같이 척화의 변을 토하고 있던 그 때, 후금은 조선이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나라 이름을 청으로 하는 황제국을 세웠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 홍타이지(청태종)는 명나라를 본격적으로 치기에 앞서 친명배금을 노골화한 조선을 확실히 복속시켜 배후의 후환을 없애겠다는 전략적 뜻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기어이 청나라가 대군으로 조선을 치러 온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조선 조정은 조금 전까지의 의기는 어디로 갔는지 우왕좌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청은 1636년(인조 14년, 병자년) 12월 3일, 3만의 군사만을 보냈던 정묘년과 달리 10만의 정예병을 보내 직접 한양을 치러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진군 도상에 있는 성들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았으므로 진격 속도가 놀라웠고, 인조 일행은 늘 하던 대로 짐을 싸 강화도로 도망을 가고자 했으나, 이미 청군은 불광동 근처에까지 도달하고 있었습니다.
진짜, 정말로, 레알~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조선입니다~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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