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103)> 숙종 9 - 장희빈(6)

이찬조 2021. 5. 4. 06:07

<조선왕조실록(103)> 숙종 9 - 장희빈(6)

기사환국으로 남인으로의 권력 교체와 장희빈으로의 중전 교체가 이루어졌듯이, 갑술환국으로 서인으로의 권력 교체와 인현왕후로의 중전 교체가 이루어지는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숙종은 전 회에서 본 것과 같이 단칼에 권력 교체를 해버린 후 곧 “예로부터 임금은 참작하고 선처하여 용서하는 도리를 잊지 않았다. 이제 은혜가 아주 없을 수 없으니 폐비를 별궁으로 옮겨 수직하고 늠료(봉급)도 주도록 하라” 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숙종은 인현왕후가 별궁으로 옮기는 날 직접 편지를 썼습니다.

- 때로 꿈에 만나면 그대가 내 옷을 잡고 비 오듯 눈물을 흘리니... 이제 별궁으로 옮기면 어찌 다시 만날 일이 없겠는가

이에 인현왕후는 다음과 같이 답장하며 숙종이 보내 온 의대를 사양하셨습니다.

- 천만 뜻밖의 옥찰이 내려오니 감격에 눈물만 흘릴 뿐 무슨 말씀을 하리이까

의대를 받네 안 받네를 두고 몇 번의 연애편지를 더 주고 받은 후 인현왕후는 궁궐로 다시 들어왔고, 숙종은 자신의 경솔을 용서하라며 버선 발로 맞이했습니다.

그리고는 중전 장희빈을 희빈으로 강등시켜 별궁으로 옮기게 하였습니다. 장희빈이 왕비가 된 지 5년 만의 일이었고, 그녀의 나이는 35세였습니다. 이어서 인현왕후를 중궁전의 주인으로 삼은 것은 물론입니다.

한편 인현왕후의 환궁에 기여한 숙원 최씨는 이 일로 숙종과 인현왕후의 사랑을 동시에 받게 되었고, 숙빈의 직첩을 받은 뒤 급기야 왕자를 생산하기에 이르렀습니다.(이 왕자가 훗날 영조가 됩니다)

졸지에 중전에서 밀려난 장희빈의 충격과 낙담은 매우 컸습니다. 그러나 과연 장희빈은 장희빈...

장희빈은 제주에 유배된 오빠 장희재, 그리고 희재의 첩이었던 숙정과 일부 남인을 동원해서 중궁전을 다시 탈환하고자 하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한 번 더 바뀌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느냐~~^)

그러나 장희빈의 뜻대로 일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로 부터 7년 후 오히려 비극의 종말이 다가왔습니다.

1701년(숙종 27) 8월 14일 인현왕후가 승하하였는데, 그 직후 장희빈이 취선당 서쪽에 신당을 설치하고 왕비가 죽기를 기도했던 일 등이 모두 발각된 것입니다.

안 그래도 죽은 인현왕후에게 부채의식이 있던 숙종은 “내 그럴 줄 알았다”며 대노해, 장희재를 참형에 처하고, 장희빈을 옹호하는 태도를 보인 남구만 등 소론을 몰락시켰으며, 드디어 장희빈에게는 자진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대신들은 장희빈의 아들인 세자를 생각해 사사 만은 면하게 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숙종은 요지부동이었고, 결국 장희빈은 내전을 질투해 모해했다는 죄목으로 42년의 생애를 마감하고 사사되고 말았습니다.
(묘소는 서오능)

장희빈의 인생 역정은 궁중 여인으로는 우리 역사상 가장 파란만장했다 할 수 있습니다.

장희빈으로 인한 개벽할 역사적 결과는 지금까지 본 것처럼 비교적 명쾌하게 드러나 있지만, 그 안에서 구체적으로,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연유와 경위로 하늘과 땅을 거푸 밟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드라마틱한 장희빈의 인생은 영원히 드라마의 극적인 소재가 될 수밖에 없다 하겠습니다.

역사는 비록 한 줄로 기록되지만 이처럼 많은 사연의 결과물들의 축약이라 할 수 있으며 그 에너지 또한 넘치기에 상상의 나래를 펴면 스토리를 지닌 역사의 매 순간이 드라마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학교에서 배운 우리의 역사는 오천년의 유구하고, 찬란하고, 강인하게 이어져 왔다고 배웠는데 알것 다 알게된 나이되니 최근 천년은 그리 맞는 말은 아닌 듯한 느낌이 듭니다.

다 맞는 말은 아니지만 그 동안 역사를 보며 주변국과의 관계를 읽는 혜안들을 지니셨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