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119)>경종 영조16 - 사도세자(9)

이찬조 2021. 5. 9. 09:43

<조선왕조실록(119)>경종 영조16 - 사도세자(9)

 

사도세자는 자신의 친자식을 낳은 후궁도 죽였고 점치는 맹인도 죽였습니다. 여러 기록에 의해 객관성을 어느 정도 확보한 것만 보더라도 사도세자가 죽인 사람의 수는 오늘날 어지간한 연쇄살인범이 죽인 숫자보다 더 많습니다.

 

정조가 읽고는 제목을 “천유록”에서 “대천록”으로 직접 고쳐주었다는 책 속에 사도세자가 죽인 사람의 숫자가 나옵니다.

 

- 세자가 죽인 중관, 내인, 노속이 거의 백여 명에 이르고 낙형 등이 참혹하다.(世子戕殺中官內人奴屬將至百餘 而烙刑等慘)

 

사도세자가 많은 사람을 죽인 희대의 살인자라는 점은 영조가 세자를 폐하며 발표한 폐세자반교문의 첫머리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또한,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나경언의 고변이 있던 그날 밤 영조가 뜰에 엎드린 세자에게 소리친 그 첫마디 역시 살인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 네가 왕손의 어미를 때려죽이지 않았느냐(汝搏殺王孫之母)

 

또, 한중록에 의하면, 세자는 어머니인 선희궁 영빈 이씨의 내인을 죽인 사실도 나오는데, 어머니를 모시는 내인을 살해한 행위는 효를 강조하는 유교국가에서 용납될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일은 점점 심각해져 심지어 친여동생 화완옹주에게도 칼을 들이댔고 그 어머니조차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간신히 죽음에서 벗어나는 사태까지 발생하였습니다.

 

- 요사이 그곳에 갔다가 거의 죽을 뻔 했는데 간신히 몸만 빠져나왔다.

 

조선 왕 중 가장 오래 재위하면서 탕평책 등의 정책으로 신하들을 쥐락 펴락 했던 노회한 정치 9단 영조가 노론의 책략에 넘어가 또는 노론의 압박에 의해 자기의 친자식을 죽이는 결단을 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영조는 이유야 어찌되었든 단순히 왕재를 기대할 수 없는 수준을 넘어 더 이상 왕족으로 존재해서는 안 되는 사이코패스 살인자를 그대로 살려 둘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영조에게 세자는 크게는 사직과 작게는 가문의 수치이자 암덩이였고, 이런 세자가 보위를 잇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일 뿐만 아니라, 단순히 폐세자 하는 것으로 해결될 일이 아닌 것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 후왕인 정조가 생부를 폐세자 상태로 두기도 어려울 것이고, 왕의 아비가 살인 행각을 벌일 경우 아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는가?

 

이즈음 세손(후일 정조)이 성군의 자질을 보였다는 점도 고려했을 것입니다.

 

한편, 신하들 입장에서도 이러한 세자가 살아 있는 것 자체가 두려움이었을 것입니다.(왕이 되어도 그렇고 폐세자가 되어도 그렇고)

 

다만, 정조의 입장에서 생부가 희대의 살인마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은 참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즈음의 승정원일기는 오려지고 세검정에서 씻겨 사라져버렸습니다. 오려지고 통째로 찢겨져 나간 곳이 100여 곳이 넘습니다.

 

승정원일기 곳곳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고 합니다.

 

- 이 아래 한 장은 칼로 삭제되었다. 병신년 전교로 인해 세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