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117)> 경종 영조 14 - 사도세자(7)

이찬조 2021. 5. 8. 20:13

<조선왕조실록(117)> 경종 영조 14 - 사도세자(7)

 

자진하라는 영조의 서슬 퍼런 명에 세자는 울며 애원했으나 영조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쩔 도리가 없음을 깨달은 세자가 자결하려 하자 춘방의 신하들이 이를 막았고, 결국 왕은 뒤주를 내오게 하고 그 속에 세자를 가두었습니다.

 

다만, 실록에는 뒤주라는 말은 나오지 않고 “안에다 엄중히 가두었다(自內嚴囚)”라고만 되어 있는데, 이런 점에서 뒤주에 8일을 가두어 죽였다는 것은 사실이 아닐 것이라는 주장도 상당히 있습니다.

 

어쨌든 지금까지의 통론은 세자가 뒤주에서 8일을 보낸 후 죽었다는 것입니다.

 

세자가 죽을 때까지 별 반응을 보이지 않던 영조는 다음과 같은 명을 내렸습니다.

 

- 어찌 30년 부자의 정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호를 회복하고 시호를 사도세자라 하겠노라.

 

장례는 두 달 뒤 치러졌는데, 영조는 친히 정자각에 들어가 곡하며 말했습니다.

 

- 그 일은 종사에 관계된 것이다. 그 때에 비로소 아버지라 부르는 소리를 들었으니 오늘은 그 마음에 보답하려 한다.

 

그리고는 “삼종의 혈맥과 만세의 통서가 오로지 세손에게 있도다”라고 하면서 세손에게 동궁의 명호를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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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인 아비가 세자의 자리에 있는 자식을 죽인 이 사건의 완전한 진실은 알 길이 없습니다.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의 청은 ‘실록’에 실려 있지 않고, 나경언의 고변서도 불태워져 존재하지 않으며, 그 당시의 ‘승정원 일기’ 역시 뒤에 세손의 청으로 사라졌습니다.

 

때문에 당대부터 지금까지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설명과 해석이 있어왔고, 특히 현대에 이르러서는 사도세자가 당쟁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했다는 설명이 많습니다. 그 내용은 대게 이런 것입니다.

 

- 세자는 경종을 모셨던 상궁 밑에서 자라면서 큰아버지인 경종과 소론에 우호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다.

 

- 대리청정 과정에서도 소론에 가까운 태도를 보임으로써 집권 노론에게 위기감을 안겨주었다.

 

- 하여 노론과 손잡은 후궁 문씨와 그녀의 오라비, 노론 출신 정순황후와 그 가문, 골수 노론인 세자의 장인 홍봉한 등이 합세하여 왕과 세자의 사이를 적극적으로 이간질하는 등 작업을 펼쳤다.

 

그러나 이러한 설은 소설의 소재로는 적당할 수 있겠지만 역사적 사실로서의 신빙성은 없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