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121)> 정조 2 - 척신 정치(1)

이찬조 2021. 5. 12. 20:28

<조선왕조실록(121)> 정조 2 - 척신 정치(1)

25세의 나이에 보위에 오른 정조에게 최우선 과제는 척신 척결이었습니다.

영조 정조 시대 당쟁의 중심에는 홍봉한 등 척신이 자리했고, 그 당쟁이 사도세자와 정조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아야 하는데, 정조는 등극 후 그 문제를 말끔히 정리하고픈 것이었습니다. 척신 당쟁 정치의 흐름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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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31년, 조정은 거의 완벽한 노론 천하가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영조의 탕평책을 지지하는 이들이 조정을 장악했으니, 그 최고의 실력자가 사도세자의 장인 홍봉한이었습니다.

홍봉한의 위세는 사도세자 죽음 이후 더욱 커져(아들을 죽인 자와 사위를 죽은 자의 동지애?) 그 아우 홍인한과 아들 홍낙임 등도 덩달아 실세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홍봉한 등과 맞서며 이들을 제거하겠다고 나선 선수들이 등장했으니, 이들은 김종수, 심환지(이른바 ‘청명당’) 등과 영조 35년 들어온 정순왕후의 일가인 김한구, 김한기, 김귀주 등이었습니다.

특히 김씨 가문의 핵심인 정순왕후의 오라비 김귀주와 청명당은 홍봉한 등을 끌어내려야만 올바른 정치가 선다며 의기투합했습니다.

이즈음 영조는 “듣자니 왕손이 추종을 외람되게 거느리고 방자하다는 말이 있는데도 조정에서 감히 말하는 이가 없다”라며 왕손인 은언군 이인과 은신군 이진을 유배했습니다.

이어서 영조는 잠저를 찾았다가 군사를 동원하는 등 호들갑을 떤 후 세자의 장인 홍봉한 등을 삭출하고, 왕손 은언군 이인의 외조부를 제주에 병사로 근무하게 하는 조치를 취하였습니다.

이로써 홍봉한 등의 세는 급격히 위축되었고, 이제 명실공히 김귀주 등 김씨가가 홍봉한 등을 대체할 만한 가문으로 자리를 잡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1년 뒤 영조는 김귀주 등이 같은 당 인물을 지나치게 천거했다며 이들 당파 신하들을 파직하고 유배 보내면서 양 측 세력의 균형을 유지시켰습니다. 홍봉한의 반격이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 후 김귀주 측이 다시 한 번 홍봉한 측에게 상처를 입힐 내용을 가지고 영조에게 처분을 요청했으나, 영조는 오히려 김귀주를 삭탈관직에 유배조치하고 척신의 추천을 금함과 동시에 당론을 금하는 명을 내렸습니다.

홍봉한과 김씨가의 싸움에서 홍봉한이 이긴 것으로 볼 수 있지만, 크게 보면 영조가 이들을 쥐락펴락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