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128)> 정조 9- 정조의 한계, 시대의 한계(2)
조선 후기, 특히 영조, 정조 시대 백성의 가장 큰 고통은 ‘환곡’이었습니다. 환곡은 본래 관서에서 춘궁기에 백성들에게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1할을 더 거둬들이는 것이었는데 이때에 이르러서는 2-3할을 더 걷어 들이는 것이 상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환곡이 지방 수령, 변장들에게 엄청난 이익을 갖다 주는 사업이 된 것입니다. 어느 새 환곡은 백성이 의무적으로 빌려야 하는 강제세금으로 변질되었고, 그나마도 빌려줄 때는 쭉정이로, 받아들일 때는 실곡으로 받는 일이 허다해서 오히려 선이자를 공제하고 빌려주는 일이 선호되기까지 하였습니다.
정조는 이러한 환곡의 폐해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고(해결은 하지 못했지만), 금난전권을 폐지(신해통공)하여 상권을 활성화 시켰습니다. 금난전권은 조정이 허가한 자 외에는 장사를 하지 못하도록 한 것인데, 이로 인해 조정 권력과 결탁한 일부가 이익을 독점했습니다. 이러한 금난전권을 완전히 폐지한 것입니다.
또한 백성의 구휼과 공노비의 처지개선에도 힘을 기울였고 서얼허통법을 통해 서얼도 진출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암행어사를 줄기차게 보내 점검을 하기도 하는 등 전후시대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백성들이 가장 살기 좋은 시대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정조가 백성의 현실에 안타까움을 표시하면서 현실을 바꾸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정조가 꿈꾼 이상은 앞서 본 세계사의 흐름에 부합하는 진정한 개혁과는 거리가 먼 삼대의 정치실현, 즉 조선 초로의 복귀였습니다.
즉, 정조는 문풍을 바로 잡아 충실한 유자를 양성하고, 그들과 함께 그런 세상을 만들려고 한 유자일 뿐, 세상을 진보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진정한 의미의 개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습니다.
또한, 정조의 개혁정치를 설명하는 핵심 키워드로 화성 건설, 장용영과 규장각 설치가 자주 언급되나, 이러한 것들의 어떤 점이 개혁의 본질과 부합한다는 것인지 제대로 설명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정조가 일찍이 규장각을 세우고, 말년에 화성 행궁과 성곽을 세우는 한편,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키운 것은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고 상왕이 되어 내려가기 위함과 자신과 어린 왕을 보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상을 현실화하기 이전에 몸이 쇠약해지면서 안동 김씨 가문의 김조순을 세자의 후견인으로 삼고 그 딸을 세자빈으로 들임으로써, 그 스스로 그토록 혐오했던 척신정치의 부활을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정조는 조선 시대 어느 왕보다 자질이 뛰어 났고, 성실히 왕 노릇을 했으며, 어느 왕보다 백성의 생활을 걱정하고 고치는 일에 몰두했다고 볼 수 있으나, 격변하는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열광할 만한 개혁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저 훌륭한 임금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는 정조의 한계이기도 했지만, 시대의 한계이기도 했으므로, 누구를 탓할 일은 아니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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