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130)> 순조 1 - 천주교 박해
순조가 등극했으나 나이가 어린 관계로 궁궐의 어른인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순왕후는 왕의 즉위를 공포하는 글에서 '척사'를 표방했는데, 이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 지금 듣건대 사학{邪學, 천주교, 서학(西學)이라고도 함} 이 불길처럼 번지고 있다.
- 수령들은 오가작통법을 닦아 밝혀 사학을 하는 자를 진멸함으로써 남는 무리가 없도록 하라.
정순왕후의 말대로 이즈음 천주교는 더욱 확산되고 있었는데,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들어오는 등 교세는 더욱 팽창되어 전국에 신도가 1만을 헤아렸습니다.
정조 시절에는 노론 벽파가 여러 차례 천주교를 엄히 다스릴 것을 요구했으나, 정조는 한결같았습니다.
- 정학이 바로 서면 서학은 힘을 못 쓰게 될 것인 고로 정학에 힘쓰는 것이 해답이다.
대비(정순왕후)의 하교는 정조의 대책이 실패한 것임을 천명한 것으로, 이들의 천주교 박해는 아래와 같은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 천주교는 군신간의 상하 관계를 중시하는 조선의 지배 윤리인 유교 윤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 천주교를 공부하거나 믿는 사람 중에 벽파의 반대파인 시파나 남인들이 많았으므로 정적을 제거하기 위함이다.
형조와 지방관아에서는 곧 동시다발적으로 천주교 신자들의 검거에 나섰고, 최초의 신부 이승훈, 정약용의 동생 정약종, 중국 신부 주문모 등 리더들과 일반 백성 등 수백 명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때 정약종의 사위 황사영이 중국으로 도망가다 붙잡혔는데, 북경의 주교에게 보낸 그의 빽빽한 문서 한 장이 조정을 경악케 했습니다.(이른바 ‘황사영 백서’)
- 청 황제를 통해 서양의 큰 배 수백 척에 군사 5-6만을 보내 조선을 압박하거나 또는 조선을 직접 통치하여 서학을 자유로이 신봉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위와 같은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인해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더욱 가혹해졌고, 추가로 수백 명이 처형되었습니다.
대격변의 19세기를 조선은 천주교 박해로 열고 있었던 것입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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