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126)> 정조 7- 정조의 분신 홍국영(2)

이찬조 2021. 5. 12. 20:32

<조선왕조실록(126)> 정조 7- 정조의 분신 홍국영(2)

정조의 훌륭한 동지 홍국영은 홍인한, 정후겸 등을 사도세자에 대해 불경했으며 정조의 즉위를 방해했다는 죄를 물어 숙청했고, 정조의 외척 홍봉한 집안도 정치적으로 재기하기 어려운 지경으로 몰아 제거했으며, 정순황후의 친동생 김귀주도 유배시키고 그 세력을 무너뜨리면서 권력의 정점에 섰습니다.

홍국영은 외척 세력을 배격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정조의 뜻을 충실히 실행했으나, 결국 자신이 스스로 외척이 되면서 위기를 자초하게 되었습니다.

정조는 혼인한 지 16년이 되도록 후사를 얻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에 대비가 후사가 급하다는 이유로 빈을 간택하도록 하였습니다.

홍국영은 자신의 누이를 빈으로 밀었고 결국 간택되었으니 이가 바로 ‘원빈’입니다.

원빈이 아들만 낳는다면 홍국영의 영화는 영원히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어 보였지만 홍국영의 기대와 달리 원빈은 불과 1년 만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홍국영의 욕심은 끝이 없었고, 결국 두어서는 안 될 무리수를 두고 말았습니다.

홍국영은 원빈이 죽은 후 새로 빈을 간택하자는 신하들의 의견을 힘으로 누르고,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의 아들인 상계군을 죽은 원빈의 양자로 삼았으며, 더 나아가 상계군을 완풍군으로 봉하여 정조의 후계로 삼고자 하는 의도를 드러낸 것입니다.

완풍군의 ‘완’은 전주 이씨, ‘풍’은 풍산 홍씨의 본관을 뜻하는 것으로, 왕손에 자신의 가문 본관을 들이밀었다는 데에 그 야심이 묻어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뿐이 아니라 홍국영은 누이 원빈이 세상을 떠난 후 정조의 비 효의왕후를 근거 없이 의심했고, 원빈이 독살당한 증거를 찾는다며 궁궐의 나인을 비롯한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문초하기까지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말없이 지켜보던 정조가 드디어 나섰습니다.

1779년(정조 3) 9월 26일, 정조는 홍국영에게 입조를 명했습니다. 이 날은 7년 전 정조와 홍국영이 처음 만난 날로서 홍국영도 정조의 공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습니다.

말 없는 정조와 한 참을 마주한 홍국영은 이렇게 아뢰었습니다.
- 오늘은 신이 전하와 길이 헤어지는 날이옵니다.
- 신이 한 번 금문 밖으로 나간 뒤에도 세상에 뜻을 둔다면 이는 나라를 잊은 것이니 하늘이 반드시 죽일 것입니다.

정조는 홍국영의 사직상소를 받아들인 후 ‘봉조하’(은퇴하는 원로대신에게 내리는 일종의 명예직함)라는 직함을 내렸고, 그날로 홍국영은 그렇게 도성을 떠났습니다. 정조가 홍국영에게 내린 마지막 은혜였다면 은혜였습니다.

외척 세력을 철저히 배격하고자 했던 정조로서는, 그러한 원칙에서 벗어나 왕위 계승에까지 개입하려는 홍국영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홍국영의 행태는 자기 자신에 대한 배신이자 정조에 대한 배신이었으며, 정조의 정치 구상과 행보에서 치워내야 할 걸림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서른의 나이에 세상의 정점에 섰던 사내, 서른둘에 봉조하라는 기록을 세운 홍국영. 그는 그 이듬해인 정조 5년, 생을 짧고 굵게 그러나 참으로 허무하게 마감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