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146)> 고종 4 - 경복궁 중건
“경복궁을 다시 세워 왕실의 위엄을 만백성에게 보여주리라!” 대왕대비 조씨가 적극 찬동하였습니다.
다만 몇몇이 현실적인 재정문제를 이유로 소극적인 반대의견을 내었으나 대세는 찬성이었습니다.
- 대원군이 한다는데...
경복궁 중건이라는 대공사가 즉각 개시되었고 한양은 물론 지방의 백성까지 자원이라는 이름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자원’이 진짜 자원이 아니라 강제징수였음은 공사 개시 한 달 뒤 대왕대비의 언급에서 드러납니다.
- 원납(願納)’이라면서도 부역할 수 없다면 경비라도 내야 한다며 빈부를 가리지 않고 거둬들이는 형편이라니, 이 어찌 된 일이오.
대왕대비가 거액의 내탕금을 하사하고, 종친들과 중신들이 성금을 헌납했으며, 원납이라는 이름으로 백성들로부터 돈을 징수했지만, 공사는 이런 것으로 감당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습니다.
또 다른 재원이 필요했습니다. 좌의정 김병학이 건의하였습니다.
- 당백전을 주조해 통보와 함께 쓴다면 재정을 늘이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당백전(當百전)은 상평통보 100전과 같은 가치를 가지는 주화를 사용하도록 한 것인데, 세상은 이를 불신하였습니다.
- 한 닢이 백 닢에 해당한다는 게 말이 돼? 그딴 거 가지고 있다가 쫄딱 망하는거야.
조정이 아무리 의지를 거듭 표명해도 백성들은 당백전을 꺼렸고 그 가치는 급격히 떨어졌습니다. 거기다 또 다른 큰 문제는 도주, 즉 위조지폐가 난무하는 것이었습니다.
적발되면 그 즉시 목이 잘리게 되나, 안 걸리면 통보의 100배 이익을 보게 되니, 잡혀 죽는 자가 속출해도 통화 위조에 목숨을 거는 자가 많아지고, 도처에 위조된 당백전이 넘쳐나니, 그 가치는 더욱 떨어지고 물가는 폭등했습니다.
급기야 대원군이 직접 나서 세금을 낼 때도 1냥 이상은 필히 당백전을 쓰게 했으나, 이러한 조치는 엉뚱하게도 수령들의 배만 불렸습니다.
- 걷을 때는 통보로, 상납할 때는 당백전으로...
당백전의 실패는 화폐제도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나온 무리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대원군은 도성의 각 성문에서 문세를 거두게 하는 등 강한 추진력을 발휘해(그 와중에 병인양요가 발생했지만) 드디어 1868년(고종 5년) 임금이 이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성균관, 종묘, 도성 각 능의 정자각에 이르기까지 대대적인 보수가 이어졌습니다.
외견상 조선은 대원군이 바라는 모습으로 바뀌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대원군은 알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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