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145)> 고종 3 - 개혁 또 개혁!

이찬조 2021. 5. 30. 21:52

<조선왕조실록(145)> 고종 3 - 개혁 또 개혁!

 

세도정치 수십 년에 벼슬은 돈으로 거래되었고, 벼슬을 산 이들은 백성 수탈에 혈안이 되었습니다. 대원군은 집권과 동시에 탐관오리 적발에 심혈을 기울임과 더불어 조정 대신들에게도 강력한 경고를 거듭 날렸습니다.

 

또 세도 가문이 장악하여 권력을 송두리째 틀어쥐고 있던 수백 년 된 권력기관인 비변사를 단칼에 폐지해 버렸습니다.

 

또한 매점매석으로 가격의 등락을 멋대로 조정해 폭리를 취해 온 도고(都賈)를 혁파하고, 양반에게도 군포를 부과하는 호포법을 실시하였으며, 민란의 가장 큰 원인이 되었던 환곡제도를 정비해 사창을 설치하는 등 대원군은 그 동안 생각해 왔던 수백 년 묵은 폐단을 놀랍게도 과감히 처치하였습니다.

 

나라의 재정수입은 늘고 백성들은 기뻐했지만, 양반 기득권층의 불만이 커져 갔으나 대원군의 서슬 퍼런 기세에 대항할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대원군은 사대부 양반들의 권력 근거지인 서원을 모조리 박살 낼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서원은 본래 선현에 대한 제사와 유자들에 대한 교육을 목적으로 탄생한 것인데 서원에 유생들이 몰려들더니 곧 붕당정치의 근거지로 자리를 잡았고, 이름 있는 서원은 지방 관아의 힘을 능가해 그 자체가 지방의 권력기관으로 자리 잡아 백성 위에 대 놓고 군림하고 있었습니다.

 

서원은 양반, 사대부의 근거지이자 상징! 다른 사안들은 일도 양단식으로 해치웠지만 대원군도 서원 혁파만은 조심스럽게 접근했습니다.

 

대원군은 전국 서원들에 대한 실태 조사를 모두 마친 후 돌연 만동묘의 폐지를 명했습니다. 만동묘는 명나라 황제인 신종과 의종을 제사지내던 곳으로 노론 사대부의 사상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깜짝 놀란 유생들이 곳곳에서 상소 릴레이를 펼쳤지만 대원군은 단호했고, 서원 철폐 계획을 눈치 챈 이들이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7대조인 인평대군을 모시는 서원을 세우는 꼼수를 쓰기에 이르렀습니다.

 

- 설마 자기 조상을 모신 곳을 헐겠어?

 

그러나 이런 꼼수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1868년(고종 5년), 전국의 모든 서원을 47개만을 제외하고 모조리 철폐하라는 단호한 어명이 내려졌습니다. 유자들이 반발했지만 대원군은 대왕대비 조씨, 안동김씨 가문의 김병학 등과 함께 이를 화끈하게 밀어붙였습니다.

 

이와 같이 관습과 교리에 얽매이지 않고 과감하고 거침없이 개혁을 이끈 대원군이지만, 그 역시 조선의 유자라는 틀을 벗어날 수는 없었습니다. 그도 정조와 마찬가지로 조선 초기의 3대를 개혁모델로 삼았는데, 이는 결국 강력한 왕권을 복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대원군의 개혁 구상에는 경복궁 재건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복궁 재건 추진은 대원군으로서는 꼭 필요한 일이었겠지만 사실은 무리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