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148)> 고종 6- 병인양요와 신미양요(2)

이찬조 2021. 5. 30. 21:56

<조선왕조실록(148)> 고종 6

- 병인양요와 신미양요(2)

 

조선을 심하게 얕보고 소수 병력만으로 중무장도 하지 않은 채 달려드는 프랑스 군!

 

정족산성 수성장에 임명된 양헌수는 포수들로 구성된 군대를 매복시켰다가 일제 사격을 명했고, 예기치 못한 기습에 프랑스군은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낸 채 물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 작은 나라 조선을 치자고 지구 한바퀴를 돌아 군대를 보낼 수도 없고, 실익도 없다!

 

이 때 프랑스군은 강화 외규장각에 있던 각종 금은궤와 주요 서적을 닥치는 대로 약탈했고 장녕전, 외규장각에 불을 지르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후 프랑스 역사학자인 박병선 박사와 정부의 외교적 노력으로 2011년 대여라는 명목으로 외규장각 약탈 도서 상당 부분이 반환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이와 같이 어찌되었든 프랑스군을 물리친 일로 자신감을 가진 대원군은 기존의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하게 되었습니다.(이 와중에 프랑스와 독일인이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한 사건까지 일어나니 대원군의 척사의지는 더욱 굳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미양요)

 

아비의 무덤까지 도굴해가는 서양인의 폭거에 대원군의 척화의지는 더욱 강고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원군은 병인양요 후 해안에 포대를 설치하는 등 해안방어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1871년 미국은 제너럴셔면호 사건을 공동조사하자는 것과 통상교섭을 하자는 내용의 편지를 정중한 필체로 중국을 통해 보내왔습니다.

 

이에 조선도 최대한 정중한 자세로 이를 거절하는 답변을 하였습니다.

 

- 우리는 작은나라로서 물산도 변변찮은 등 교역할 만한 것이 없으니 가라고 전해주소.

 

이를 전해들은 미국은 군함 5척에 1,200명의 군사를 싣고 조선 해안에 나타나 북상을 계속하였습니다. 미국 배가 손돌목을 들어서자 광성진에서 준비된 조선 해군이 대포를 쏘았으나 배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미국은 광성진을 공격했고 성채는 이내 허물어졌습니다. 이재연이 이끄는 조선군이 죽기로 맞섰으나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 이재연을 비롯한 조선군 350명이 죽고 미국 사상자는 3명에 지나지 않았다!

 

보고를 받은 대원군은 더욱 척화의 의지를 불사르며 이날로 종로와 주요 도시에 척화비를 세웠고, 열악한 장비에도 불구하고 미군이 정박한 초지포를 공격해 결사항전의 의지를 명백히 하였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미국은 결국 소리 없이 조선을 떠났습니다.

 

- 참으로 완고한 조선이로다. 이깟 조그만 나라에 먹을 것도 없는데 일단 떠나자.

 

- 조만간 다시 오면 되지 않겠나.

 

신미양요는 미군이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나 조선의 입장에서는 결사 항전하여 이양선을 몰아낸 사건으로 인식되었습니다. 대원군은 이를 계기로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고 쇄국 정책을 더욱 고수하게 되었으나 조선이 척화만으로 생존할 수만은 없다는 인식이 식자층에서 힘을 얻어가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