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149)> 고종 7 - 대원군의 실각(1)
대원군의 개혁은 성공한 것인가? 그렇습니다. 대원군의 개혁은 조선 역사에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대성공이었다고 봅니다.
그는 60년 묵은 세도정치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청산했으며 수 백년 묵은 조선의 병폐들에 대해 과감히 메스를 댔습니다.
어느 것 하나도 기득권의 반발을 우려해 눈치보기를 했다면 역풍에 밀려 실패했을 사안들로서, 개혁군주라는 영조나 정조도 전혀 이루지 못한 일입니다.
-오척단구이나 온몸이 담력덩어리!
그러나 대원군의 개혁은 누구도 이루지 못한 대성공이었음에도 더 큰 성공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대원군의 실각과 함께 퇴색하고 말았으니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그것은 열강의 세계침략과 전 지구적 자본주의화라는 시대적 상황에 부응한 개혁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개혁이 100년 전 아니 60년 전만 이루어졌어도 국력을 신장할 토대가 되었겠지만 때는 바야흐로 19세기 후반!
최소한 병인양요에서 방향을 틀어야만 했습니다.
-모든 것에서 비교불가의 전력 차이가 눈 앞에서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았는가.
하다못해 중국식 동도서기라도 수용해 발전된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였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대원군은 그러지 못하고 달팽이처럼 자기 집에 틀어박혀 살 수 있다고 오판했으니 그것이 대단한 성공을 허무한 실패로 전락시키고 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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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살 소년 고종이 어느덧 스물이 되었습니다. 당연히 장성한 고종으로서는 친정을 꿈꿀 수밖에 없었습니다.
-진짜 왕이 되고 싶다!
그러나 아비는 물러날 생각을 하지 않고 신하들은 아비만 쳐다봅니다.
불만은 쌓여갔지만 별다른 수는 보이지 않는데 이때 강력한 조력자가 나타나니 바로 중전입니다.
열여섯의 나이에 한 살 어린 고종과 혼인한 중전 민씨!
그녀는 세도정치의 폐해를 절감한 대원군이 직접 고른 최적의 며느리였습니다.
- 대원군 부인 집안으로서 세도를 부릴 마땅한 사람도 없다!
그런데 혼인 초 중전 민씨는 고종의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고종은 궁인 이씨를 아꼈고 그 녀는 고종 5년에 아들을 낳기까지 하였습니다. 귀하게 얻은 왕실의 손이라 대원군도 고종도 아이를 아꼈고(운현궁에서 자람) 반면 중전 민씨의 외로움은 커져만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3년 후 중전 민씨도 드디어 아기를 낳았으나 곧 죽고 말았습니다.
- 항문이 막혔다고 하는데, 왜 하필 이런 일이 왕실에 일어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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