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155)> 고종 13- 개항 이후의 변화와 강력한 반발

이찬조 2021. 5. 30. 22:04

<조선왕조실록(155)> 고종 13

- 개항 이후의 변화와 강력한 반발

 

강화도 조약 체결과 함께 일본은 사신 파견을 요청했고, 조선은 김기수 등 70명을 수신사로 보냈습니다.

 

일본을 둘러보고 온 김기수는 고종에게 보고하였습니다.

 

- 저들은 여러 나라의 기계들을 모두 배웠고, 풍속이 대개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데 힘쓰고 있었사옵니다.

 

한편, 개항 이후 일본과의 무역 규모가 중국과의 무역규모보다 훨씬 커졌고, 일본의 정치적 영향력도 커져가자 급해진 것은 중국이었습니다.

 

- 이대로 두었다간 일본이 조선을 통째로 먹고 말거야.

 

때마침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이 조선과의 통상을 할 수 있도록 중국에 부탁을 해 오자 중국 북양대신 리홍장은 조선에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 서양의 여러 나라들은 오로지 통상하자는 것! 귀국이 그들과 수교한다면 일본 뿐 아니라 러시아가 엿보는 것까지 막아낼 수 있습니다.

 

이에 조선은 다음과 같이 답장했습니다. 참 겸손하기도 합니다.

 

- 우리의 바람은 자나 깨나 당신의 덕을 입어 중대한 일마다 지도를 받는 것뿐입니다.

 

상황이 이쯤 되고 보니, 고종도, 신하들도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데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조선 조정은 1880년 김홍집을 일본 수신사로, 중국에도 김윤식을 영선사로 삼아 38명의 유학생을 파견하였으며, 그 결과를 종합해 조정에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해 중국식 개화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이즈음 중국 참찬관 황쮼센을 만나고 온 김홍집이 외교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책으로 정리해 조정에 제출하였습니다.(사의조선책략)

 

- 러시아의 침략을 막으려면 중국과 친하고, 일본과 결합하고 미국과 연대해야 합니다.

 

고종은 이 정책을 그대로 받아들일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개화의 길을 망국의 길로 보는 유생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전국의 유생들은 조선책략의 내용은 물론 일본과의 조약 자체를 격렬하게 비판하는 내용이 소를 거듭 올리는 등 강력한 위정척사운동을 벌였습니다.

 

고종은 대부분의 상소자를 유배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했지만 홍재학 등 대표적 유자를 참수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와중에 대원군 세력과 연계된 역모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대원군의 측근으로 불리는 안기영이 개화파는 물론 고종까지 몰아 낼 역모를 계획했다가 내부 밀고로 발각되어 다수가 효수되고 대원군의 서자 이재선이 사약을 받는 사태에 이른 것입니다.

 

고종과 중전은 당연히 대원군이 관여한 일로 받아들였습니다.

- 보셨죠? 아버님이 어떤 분이신지

 

개입 여부와 관계없이 개화에 대한 광범위한 반발은 다시금 대원군을 주목하게 만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