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153)> 고종 11- 운요호 사건, 강화도조약(1)

이찬조 2021. 5. 30. 22:01

<조선왕조실록(153)> 고종 11

- 운요호 사건, 강화도조약(1)

 

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한 일본은 급속히 제국주의화가 되어 대륙침략의 첫 단계로 정한론(征韓論)을 내세우며 조선을 침략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이즈음 조선에서는 강경한 쇄국양이정책을 고수하던 대원군이 실각하고 고종이 친정을 시작하면서 민씨 척족 세력이 집권하게 되었는데, 일본에게 있어 대원군의 실각은 고무적 현상이었습니다.

 

일본은 1875년 5월 이미 대만정벌을 시도해 대만을 점령한 바 있었는데, 조선이 이 소식을 듣고 겁을 먹었다고 판단하고 다음과 같은 외교 방안을 마련하였습니다.

- 대원군의 재집권 전에 개항을 성취하여야 한다.

- 일본 군함 한 두 척을 파견해 해로를 탐측하면서 무력시위를 벌이면 일본이 교섭에 유리한 지위를 획득할 수 있다.

 

일본은 이러한 계획에 따라 영국에서 사들인 신식 전함 운요호 등 2척을 파견해 동해안으로 북상, 영흥만까지 순항하면서 무력적 시위를 벌이고 남해안과 동해안을 탐측, 시위한 뒤 1875년 9월 20일 강화도 동남방 난지도에 정박하였다가, 이노우에 이하 수십 명의 해병을 초지진으로 침입시켰습니다.

 

강화해협을 방어하던 조선수비병이 침입해오는 일본의 보트에 포격을 가하자 이노우에는 모함인 운요호로 철수하며, 이를 빌미로 초지진에 맹렬한 근대식 포격을 가하여 초지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같은 날 오후에는 제물포 영종진에 포격을 단행하고, 일본군 수병 22명이 영종도에 상륙작전을 펼쳐 일대격전이 벌어졌습니다.

 

이 전투에서 첨사 이만덕이 이끄는 400∼500명의 조선수비병이 맞섰으나, 조선군은 패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사망한 조선군은 35명, 일본군은 2명뿐이었으니, 그 전력 차가 참으로 컸습니다.

 

일본군은 닥치는 대로 불태우고 약탈한 후 선상 파티를 벌인 다음 유유히 나가사키로 귀향했습니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조선 조정은 일본이 보낸 문서의 형식에 문제가 있네 없네 하며 논란을 거듭했지만, 정작 일본은 그런 데에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