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172)> 망국 9 - 조선의 1894년(7)

이찬조 2021. 6. 19. 12:49
<조선왕조실록(172)> 망국 9 - 조선의 1894년(7)

1894년 9월 15일, 평양에 집결한 일본군은 청나라 군대를 기습했고, 청군은 지리멸렬하다 완전히 무너져버렸습니다. 말 그대로 파죽지세였습니다.

- 청군 사망자 2,000명에 부상자가 4,000명, 일본군 사상자 500여 명

그 이튿날인 9월 17일에는 압록강 하구에서 청나라 북양함대와 일본 함대가 맞붙었는데, 청나라 북양함대가 화력에서 우위에 있었음에도 일본 함대에 무참히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한편, 평양에서 패배한 청나라 군대는 압록강 넘어 강변에 요새를 만들고 일전을 준비했으나, 병력을 보충한 일본군은 10월 24일 밤 압록강을 건너 청군을 무너뜨렸고, 다음날에는 단둥의 청군 기지를 공격하여 중국 본토에 발판을 마련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곧이어 일본군은 요동반도 남쪽 도시들과 여순항을 점령하였고, 해를 넘긴 1895년 3월에는 북경이 바라보이는 곳에 진지를 구축했으며, 타이완에도 상륙함으로써 동중국해는 사실상 일본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1년도 되지 않아 일본에 무참히 패한 청은 1895년 4월 17일 일본에 사실상 항복을 하며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 거액의 전쟁보상금 지급, 랴오둥 반도, 대만 등 할양 등 등

1894년 즈음까지 조선에서 종주국을 자임하며 외견상 일본을 누르고 있던 청은 준비된 군대를 보유한 일본에 이와 같이 무참히 깨졌습니다,

이로 인해 청은 조선과 다름이 없는 신세, 즉 세계열강의 식사꺼리로 완전히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그 넓은 땅덩어리도 그 많은 인구도 아무 짝에 쓸 데가 없었습니다.

한편, 청과의 전쟁 명분을 얻기 위해 경복궁을 습격한 일본은 반일 여론 무마와 조선 지배의 편의를 위해 두 가지 카드를 사용했습니다.

그 하나는 중국에 억류되었다가 돌아와 아들과 며느리에 의해 가택연금 상태에 있던 대원군을 전면에 등장시킨 것입니다. 녹두장군 전봉준마저도 대원군에게 손을 내밀 정도로 대원군에 대한 국민의 신망이 매우 높은 점을 고려한 것입니다.

- 우리가 힘을 찾아드릴 테니 함께 개혁을 도모해보지 않으시렵니까?
- 좋소!(빠드득)

경복궁을 장악한 일본군은 고종에게 요구했습니다.

- 전권을 대원군에게 넘기시오!

그렇게 돌아온 대원군은 원성이 높은 민씨 일가를 축출하고 곧 의욕적 행보를 하기 시작했지만, 대원군이 그 뜻대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일본이 친일적 성향의 내각을 구성해 배후에서 이들을 조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 뭐냐?...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