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실록 <(169-1)>- 동학 탄생의, 시대적 배경과 이념 -

이찬조 2021. 6. 7. 20:46

실록 <(169-1)>
- 동학 탄생의, 시대적 배경과 이념 -

* 진주민란 *

진주민란의 직접적인 발생 계기는 경상우병사 백낙신의 탐학과 착취에 있었다. 백낙신이 민란이 일어나기 전 몇 년 동안 착취한 돈만도 약 5만 냥에 달했는데, 쌀로 환산하면 약 1만 5천 석이나 되는 엄청난 양이었다. 게다가 당시 진주목에서는 지금까지 지방 관리들이, 불법적으로 축낸 공전이나 군포 등을 보충하기 위해, 그것을 모두 결세에 부가시켜 해결하려 했는데, 그 액수가 2만 8천 석에 축난 환곡만 해도 2만 4천 석이나 되어, 농민 부담이 급격하게 가중될 처지에 있었다. 이에 농민 봉기군들은 스스로 초군이라 부르면서, 머리에 흰띠를 두르고 진주성 으로 쳐들어 갔는데, 그 수가 수만 명에 이르렀다. 이에 당황한 우병사 백낙신은 환곡과 도결의 폐단을 시정할 것을 약속했으나, 농민들은 그를 놔주지 않고 죄를 묻는 한편, 악질적인 아전 몇 명을 죽이고 원한을 샀던 토호의 집을 불태웠다. 
6 일간이나 계속된 진주민란은 그동안 23개 면을 휩쓸었고 120여 호의 집이 파괴되고, 재물 손실이 10만 냥을 넘었다. 단성을 시작으로 진주에서 폭발한 이 민란은 곧 경상, 충청, 전라, 황해, 함경도의 5도와 경기도 광주에서 무려 37차에 걸쳐 일어난다. 크게는 수만 명에서 작게는 천여 명에 이르는 규모로, 전국 각지의 농민들이 악정에 대항하여 민란에 참가했다.

-동학의 탄생-

동학은 1860년(철종11년) 4월에 최제우가 창도한 종교로서, 그 교지가 시천주 신앙에 기초 하면서도, 보국안민과 광제창생을 내세운 점에서, 민족적이고 사회적인 종교라 할 수 있다. 동학이라는 명칭은 교주 최제우가 서교인 천주교에 대항하여, 동방의 도를 일으킨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며,1905년 손병희에 의해서 천도교로 개칭 되었다. 창도 당시 동학은 시천주 신앙을 중심으로 모든 서민이, 내 몸에 한울님을 모시는 입신에 의하여 군자가 되고, 나아가 보국 안민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나라, 구제 신앙 이었으나 2대 교주 최시형에 가서는,'사람 섬기기를 한울같이 한다'는 사인여천의 가르침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는 인간 뿐만 아니라 모든 산천초목에 한울님이 내재 한다고, 보는 범천론 적 사상으로서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또한 3대 교주 손병희에 이르러서는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인내천 사상을 교지로 선포하였다.


-동학의 초대교주 최제우-

최제우는 1824년 순조 24년에 경주 최씨 옥의 서자로 태어났다. 몰락 양반 가문 출신인 그는 젊은 시절에 의술, 복술 등 여러 방면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세상의 어지러움이 바로 천명을 돌보지 않기 때문에 생긴 것임을 깨닫고, 천명을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한다.

1856년 천성산에서부터 시작된 그의 구도 노력은,1859년 구미산 용담정 수도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그가 파악한 당시의 사회상은 왕조의 기운이 쇠하여, 개벽이 필요한 말세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위기 의식에서 최제우는 서학과 서교에 대한 대응으로, 동학이라는 새로운 도를 제창하게 되었다. 그가 본래 이름인 제선을 제우로 고친 것도, 종교적으로 구국과 제세의 길을 찾겠다는 자각에서 나온 것이다. 1860년 4월 5일 마침내 그는 득도 체험을 하고, 동학이라는 새로운 종교를 창제 하였다.

그로부터 1년간 가르침에 마땅한 이치를 체득하고, 도를 닦는 순서와 방법을 만들어 1861년부터, 본격적으로 새로운 신앙을 포교하기 시작하였 다. 특히 경주 일대를 중심으로 신도가 많이 모여 들었는데, 동학이 가지고 있는 민간 신앙적 성격이, 신앙적 결집을 촉진 하였다. 동학은 기성 종교인 유교와 불교의 쇠운설을 주장하는가 하면, 유교 사상을 비판적으로 흡수하였다.

그는 서민들이 수학 기간을 거치지 않고도 입도할 수 있으며, 입도한 그날부터 군자가 될 수 있다고 하여, 서민이 군자의 인격을 갖추는 길을 열어놓았다. 또한 동학의 교지인 '시천주' 사상을 통해 각 개인이 천주를 모시는, 인격적 존재이자 각자 자기 안에 천주를 모신 주체임을 강조하였다. 이와같은 동학 사상은 후에 일어날 동학 농민혁명에, 사상적 영향을 끼쳤음은 물론이거니와, 인간 관계가 상하 주종의 지배, 복종 관계가 아니라 누구나 다 같이, 천주를 모시고 있는 존엄한 존재이다 라는, 평등한 관계임을 가르침으로써 근대적 사상의, 선구적 위치에 서게 되었다.

한편 동학교도들의 교세가 날로 커지자 조정에서는, 동학도 서학과 같이 민심을 현혹시킨다 하여, 나라가 금하는 종교로 규정하고, 1862년 9월 교조 최제우를 백성을 현혹 시킨다는 이유로, 경주 진영에서 체포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수백 명의 제자들이 석방을 청원하여 무죄 방면 되는데, 이 사건이 곧 동학의 정당성 입증으로 받아 들여져 그 후, 교세가 더욱 커졌다. 신도가 늘자 그 해 12월에 각지에 접을 두고,그 지역의 접주가 지역 신도를 이끌게 하는 접주제 를 두어,1863년에는 교인 3천여 명, 13개 접소를 확보 하였다. 이 해 8월에는 최시형에게 도통을 전수하고 제2대 교주로 삼았다.

당시 관헌의 지목을 받고 있었던 최제우가 미리 후계자를 세워놓은 것이다. 한편 조정에서는 동학의 교세 확장에 두려움을 느끼고, 최제우를 다시 잡아들일 것을 명하니 그 해 11월 20일 최제우는 선전관 정운구에 의하여 경주에서 체포되었다. 최제우가 한양으로 압송되는 도중 철종이 죽자,1864년 1월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어, 3월 10일 사도난정의 죄목으로 효수에 처해졌다. 이때 그의 나이 41세였다. 그러나 한 번 일 어난 동학의 불길은 2대 교주 최시형에 이르러, 더욱 그 사상적 기반을 다지면서 조선 말기의 국내외 정세에, 크나큰 영향을 미치는 민족 종교로 발돋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