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189)> 망국 26- 나라가 망하다!(3)

이찬조 2021. 6. 19. 17:13
<조선왕조실록(189)> 망국 26
- 나라가 망하다!(3)

헤이그 밀사 파견이 알려지자, 고종 황제의 입장이 매우 어려워졌습니다.

1907년 7월 16일 어전회의, 이토 히로부미가 직접 나설 것도 없이 농상공부대신 송병준이 다그쳤습니다.
- 이제 방법은 폐하께서 일본 천황폐하께 사과하거나 대한문 앞에 나아가 하세가와 사령관께 사과하는 것뿐입니다!

이완용은 더 나아가 고종 황제의 퇴위를 강력히 요구하였습니다.
물론 이토 히로부미와 사전에 논의된 일이었습니다.
- 양위로써 사죄하는 길만이 대한제국의 살길입니다!

같은 날 내각회의는 고종 황제의 퇴위를 결정했습니다.
- 우리에게 이런 권한이 있나? 나도 몰러!

고종 황제는 원군으로 박영효를 부르는 등 완강히 양위를 거부했지만,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전혀 없었습니다.

고종 황제의 완강한 저항이 계속되자 17일 저녁에서 18일 새벽까지 이완용, 송병준 등은 내관도 다 내보내고 전화선까지 끊은 채 고종 황제를 끊임없이 압박해 드디어 원하는 대답을 얻어내고야 말았습니다.
- 군국의 대사를 황태자로 하여금 대리케 하노라!(양위가 아님)

일본 측은 대리 청정의 의사를 양위로 마음대로 해석하고, 황제와 황태자도 없는 가운데 약식으로 양위식을 갖고는 이를 세계 각국에 알려 기정사실화 시켜버렸습니다.
- 황제는 커다란 걸림돌이야. 노련하고 수가 많거든!

고종 황제는 자신이 물러나면 이제 500년 조종이 막을 내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양위를 끝내 거부했지만, 결국 이렇듯 강제로 퇴위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고단했던 44년의 재위였습니다.

양위식이 있고 나자 일본은 곧바로 정미7조약을 셀프로 체결했습니다.
- 조선 정부가 통감의 밑에 있음을 확인하는 내용!

그리고 다시 일주일 뒤에는 군대 해산령을 내렸습니다.
이제 비록 미약하나마 존재하는 한국 군대 자체를 없애, 편하게, 아주 편하게 합병을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계획에 차질이 생겼습니다. 시위대 1연대장 박승환이 항의의 뜻으로 권총 자결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소식을 들은 병사들은 격분하여 거리로 진출해 일본군과 시가전을 벌였고, 집단 탈영해 의병 부대에 대거 합류했습니다.
- 어서 오시오. 나가자. 싸우자. 이기자.

전국의 의병 부대는 연대를 모색해 무려 1만 명이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삼아 양주에 집결한 후 서울진공작전을 펼치기까지 하였으나, 일본의 대토벌작전으로 수많은 의병과 의병장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살아남은 의병들은 더러는 국경을 넘어 항전했고, 더러는 망국 후 독립군으로 발전해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