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188)> 망국 25 - 나라가 망하다(2)

이찬조 2021. 6. 19. 13:26
<조선왕조실록(188)> 망국 25 - 나라가 망하다(2)

을사조약 체결에 조정 대신 민영환은 비분강개하는 글을 남긴 채 자결을 했고,

그 소식을 들은 행랑채에 살던 인력거꾼도 뒷산의 소나무에 목을 매 주인의 뒤를 따랐습니다.

이보다 앞서 주영 공사 이한응이 조약체결을 막지 못한 것을 한탄하며 자결하였습니다.

- 슬프다! 종사는 장차 무너질 것이요 온 겨레가 모두 남의 종이 되겠구나!

갑신정변의 주역 홍영식의 친형 홍만식도, 강직한 대신 조병세도, 학부 주사 이상철도,
평양친위대 김봉학도, 경연관 송병선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으로 일본에 항거함과 아울러 고종과 대신과 백성의 각성을 구하였습니다.

이렇듯 을사조약 체결에 대한 반발이 극렬했지만,

이완용 등은 오히려 당초 다소 부득이한 찬성에서 적극적 찬성으로 선회하며 조약 하의 정국을 기정사실화 하였습니다.

- 이리 될 게 뻔한 일이었는데, 어찌할 힘도 없으면서 우리에게 다 덮어씌운단 말이냐!!!

사실 이완용 등 5적이 없었더라도 조약은 좀 늦춰졌을 지언정 체결 자체를 피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미 일본이 러일전쟁의 승전국으로 국제적 동의를 얻은 일인데다, 당일 총칼로 위협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라를 일본에 넘기는 일에 대놓고 도장을 찍은 자에게 돌아갈 동정은 있을 수가 없다 하겠습니다.
(이들의 그 후 행보는 총대를 맨 수준이 전혀 아닙니다)

한국의 지사들은 을사조약 체결 후 앞에서 본 것처럼 더러는 목숨을 내던지고,

더러는 무력으로 일본군과 을사 5적에 맞서기도 하고,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는 자강운동을 벌이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이 때부터 일진회 같은 것을 만들어 일본의 정책에 적극 협조한 세력 역시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두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 힘이 없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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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히로부미는 초대 통감으로 들어온 후 내각을 이완용 등 친일파로 채우고,

각 부문별로 고문관을 두어 한국 내정까지 틀어쥐었습니다.

고종황제는 이토히로부미를 통감이라 부르지 않는 등 나름대로 저항을 하는 한편,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리자 이준, 이상설을 보내

을사조약의 강제성과 위법성 을 대외에 알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계를 움직이는 것은 법이나 정의가 아니라 힘 이었습니다.

한국호가 점점 기울어져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