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192)>망국 29 - 나라가 망하다(6)

이찬조 2021. 6. 19. 17:20
<조선왕조실록(192)>망국 29 - 나라가 망하다(6)

안중근은 1909년 3월 26일 오전 10시에 사형 집행을 당했습니다. 안중근은 죽기 전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습니다.

-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 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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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청일전쟁, 러일전쟁, 1905년의 을사조약, 1907년 의 정미7조약 등의 절차를 거쳐 1910년에 이르러 당초 예정했던 대로 드디어 한국을 속국화하기 위한 조치에 돌입했습니다.

일부에서는 안중근의 이토히로부미 처단으로 인해 한일합병이 진행된 것처럼 말하나, 일본 내각은 이토 히로부미 처단 3개월 전인 1909년 7월, 비밀리에 ‘한국병합 실행에 관한 방침’을 의결한 바 있으므로,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일본은 1910년 3월 토지조사국을 설치하여 근대화란 미명하에 한국 토지를 마구잡이식으로 약탈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후, 1910년 5월 30일 일본 육군대신 데라우치를 3대 통감으로 취임시켜 한일합병을 급속도로 추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일본의 한일합병 정책에 가장 적극적으로 앞장 선 이는 송병준과 이완용이었습니다. 이들은 서로 경쟁하며 앞 다투어 한일합병 계획을 추진했습니다.

- 한일합병에 우리가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
- 내가 더 친일이오! 믿어주시오!!!

일본은 일진회 고문 스기야마 시게마루, 그리고 이용구, 송병준, 이완용 등의 경쟁을 적절히 유도하여 먼저 조선 에서 ‘합방청원서’를 만들도록 하는 한편, 합병반대 소요가 일어날 것에 대비하여 청진, 함흥, 대구 등지에 주둔한 일본군을 서울로 이동시켰습니다.

1910년 8월 22일, 데라우치 통감은 어전회의에 일본의 합병안을 내밀었고, 이 조약은 그대로 체결되고야 말았습니다.

불려온 대신들 중 유일하게 학부대신 이용직 만이 반대를 주장하다 쫓겨났고, 이완용, 윤덕영, 민병석, 고영희, 박제순, 조중응, 이병무, 조민희 등 8명의 친일파 대신이 조약 체결에 찬성함으로써 같은 날 조약이 체결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