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

고려왕조 실록 8 - 태조 7

이찬조 2021. 7. 9. 06:47

* 건국과 혼란의 수습

폭군의 악정을 뿌리치고 새 임금을 맞이하였으나 후고구려의 상황은 개탄을 금지 못할 정도로 피폐한 상태였습니다. 위압과 모멸, 혹독한 폭력으로 백성과 신하들을 다스린 궁예에 의해 국토는 황폐해졌고, 백성들은 도망쳐 인구는 줄어들었으며, 어디를 가든 고통의 신음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의 뜻은 수십 갈래로 갈라져 중심을 잃은 지 오래이고, 중앙정부의 통제가 먹히질 않으니 지방호족들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생활권을 형성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다 보니, 비록 왕위에 오르긴 하였으나 태조 왕건의 입지는 그리 튼튼하지 못하였습니다. 게다가 밖으로는 강성한 견훤의 후백제와 쇠망하여 가기는 하지만 오랜 역사의 신라가 버티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상황에서 민족의 통일도 고도의 회복도 먼 훗날의 일일뿐이었고 당장 나라를 내부적으로 안정시키는 일이 무엇보다 급선무였습니다.
나라 안이 편해야 바깥일도 생각할 수가 있지요.

우선은 민심을 수습하고, 각 지방에서 막강한 세력으로 웅거하고 있는 지방의 호족들을 중앙정부로 끌어들이는 것이 우선 과제였습니다.

그러나 당장은 그럴만한 힘이 없는 왕건은 고심 끝에 두 가지 방안으로 해결을 해나가게 됩니다.

우선은 숭불 정책을 통하여 백성의 갈라진 민심을 하나로 결집해 나가고 후고구려와 신라의 관제를 병용하여 인재를 널리 등용함으로써 민심의 수습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방호족들 문제는 지속적으로 그를 괴롭혔는데, 국가의 기반과 힘이 강력하지 못한 시기 인지라 자체 군사력까지 갖춘 호족들은 결코 무시 못 할 대상들이었습니다.

자칫 갈등이 깊어져 반란이라도 일어나는 날이면 국가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울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따라 태조는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의 방법으로 지방호족과의 혼인을 통하여 내부 문제를 해결하고 져 하였습니다. 예로서 정주 호족 유천궁의 딸 신혜 왕후 유씨와 혼인하여 얻은 것이 참 많았기 때문입니다.

국호를 고려로 정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로 고치고 나서, 충주의 유력한 호족 유긍달의 딸을 신명순성왕후로 맞아들이는 것을 시작으로 혼인 정책을 치밀하게 펼쳐 나가는데, 우선은 자신이 장수 시절에 끈끈한 연을 맺은 우호적인 지역의 유력한 호족들의 딸부터 자신의 마누라로 들여앉히는 작전을 펴나갑니다.

그리하여 호족들에게는 안도감을 심어주고 자신은 그 호족들의 힘을 자신의 힘으로 끌어들이는 방법으로 내부적인 안정을 다져가게 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혼맥으로 인척 관계를 만든다는 것이 가장 큰 지원세력을 얻게 되는 수단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다 보니 왕건은 29명의 마누라를 거느리게 되었는데 호족의 파워에 따라 6명의 왕후와 23명의 부인 들입니다. 여복은 많은데 힘 좀 들었겠다. 밤마다 -- 그래도 부럽다.

한편 궁예의 정권 아래에서 한 가닥씩 하던 인물들이 연달아 반란을 일으키는데, 이혼암, 황선길, 임춘길 등이 바로 그들입니다.

궁예 밑에서 자신들과 권력 경쟁을 하던 자가 임금이 되었으니 위협을 느낀 탓이겠지요.

황선길 형제가 반란을 일으켜 막강한 군사력으로 성사 직전까지 가지만 결국 근위병들에게 붙잡혀 처형을 당하고, 이흔암은 거사 전에 발각되어 처형을 당하고, 궁예의 관심을 받던 청주 출신 임춘길과 매곡 성주 공직의 처남도 반란을 일으키나 실패하여 처형당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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