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

고려왕조실록 10 ㅡ 태조 9

이찬조 2021. 7. 10. 06:59
* 전쟁의 시작

924년 7월, 조물성(안동 부근)은 군사적인 요충지로 고려와 후백제 간에 여러 차례 전투가 벌어진 곳이었습니다. 당시에는 고려가 이를 점령하고 있었는데 견훤이 공격을 감행해 온 것입니다.

견훤은 자신의 두 아들 수미강과 양검을 직접 보내 회심의 일전을 벌였으나 성문을 굳게 닫아걸고 버티는데다가 태조가 보낸 구원병이 들이닥치자 후백제의 군대는 많은 손실을 입은 채 퇴각하고 맙니다.

이 전투가 태조 왕건이 왕위에 오르고 나서 후백제와 가진 첫 번째 전투인데, 일차는 왕건의 승리로 끝나게 되고, 그해 8월 견훤은 사절을 파견하여 옥색 말 한필을 보내 화해를 청하였지만, 조물성 전투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다음해 10월, 이번에는 견훤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조물성을 다시 공격하는데 이때는 태조 왕건도 직접 군사를 아끌고 나가 응전하였습니다.

막상막하의 접전이 수차례 이루어지던 중 고려의 정서대장군 유금필이 원군으로 합류하자 고려군은 사기가 충천하여 맹공을 가하게 되고 견훤의 군사들은 고려의 군사보다 세가 훨씬 강했지만 기세에 눌려 겁을 먹고 주춤거리기 시작합니다.

견훤은 부하 장졸들이 주춤거리며 겁을 먹은 것을 눈치 채고 어쩔 수 없이 사자를 보내 화친을 청하게 되는데, 왕건 또한 힘으로 후백제의 군대를 제압하기에는 무리가 있음을 알고 있었으므로 극적으로 화친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견훤은 사위 진호를 인질로 보내왔고 태조는 사촌동생인 왕신을 교환인질로 보내면서 비록 잠깐이나마 고려와 후백제 사이에는 전운이 걷히고 평화가 도래하게 됩니다.

926년 4월 견훤이 인질로 보낸 진호가 병으로 죽는 불상사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태조는 시신을 정중히 모셔 돌려보냈으나 견훤은 고려가 진호를 죽인 것이라며, 볼모로 있는 왕신을 죽여 버리고 즉시 웅진 방면으로 군사를 진격시킵니다. 그러나 태조는 성문을 굳게 닫고 지키기만 할 뿐 나가서 싸우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역시나 기다림에 지친 견훤은 제풀에 껶여 철군하고 맙니다.
그 후로도 크고 작은 싸움이 여러 번 일어났으나 고려와 후백제의 전력 차가 뚜렷하게 기울기 시작한 것은 공산전투를 치르고 난 다음이었습니다.

927년 9월 견훤은 신라를 급습합니다. 후백제군이 경주 가까이 육박하자 신라 경애왕은 고려에 구원을 청하게 되고, 태조는 즉각 신라를 지원토록 합니다. 태조의 입장에서는 오랜 신라와의 동맹의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은 신라가 무너지고 나면 아직 상대적으로 전력이 약한 고려로서는 후백제를 상대하기가 버거우므로 신라와 연대하여 후백제에 맞설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려의 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견훤의 군대는 신라의 수도를 유린해나가기 시작하였고 포석정에서 연회를 즐기던 경애왕과 왕비는 도망쳤으나 남쪽 별궁에 숨어있다 붙잡혀 끌려왔고 견훤은 경애왕을 죽이고 왕비를 겁탈하였습니다.

전부터 신라의 왕비가 절세미인이라는 소문을 듣고 있던 견훤은 주석에서도 취기가 돌면 간혹 “이 넓고 넓은 우리 백제 땅에 신라의 왕비만한 미인 하나가 없다는 말이냐”하고 푸념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신라 왕비를 보자 현기증이 났는지 말까지 더듬거렸다 하네요.

왕비에게 “그대가 앞으로 나를 주인으로 섬긴다면 왕의 목숨도 살려 줄 것이고 여생에 온갖 호사를 누릴 수 있도록 해주겠다”하고 제안을 하였으나 왕비가 거절하자 경애왕을 죽여버리고 왕비는 강제로 겁탈해 버렸는데, 일국의 왕비로서 적장에게 강간을 당한 왕비는 수치심에 자결하고 맙니다.

또한 군사들에게는 궁녀와 아녀자들을 닥치는 대로 강간하도록 내버려두니 그야말로 아비규환이 따로 없는 정황이었습니다.

한차례 분탕질이 끝나자 견훤은 경애왕의 의종제 김부를 왕으로 세우고 나서 왕의 아우 효렴과 재상 영경 등을 포로로 하고 금은보화를 잔뜩 약탈하여 후백제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고려군이 신라에 도착한 것은 견훤이 신라로 돌아간 뒤였습니다.

뒤늦게 신라에서 벌어진 사태를 보고 받은 태조는 진노하여 사절을 보내 조문과 제사를 치르게 하고, 친히 5천의 기병을 데리고 공산도수(대구지방)로 나갔습니다.

이윽고 견훤의 군대와 마주친 태조는 큰 전투를 벌였으나 형세는 태조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급기야 견훤의 군대가 태조를 포위하며 쳐들어오자 고려의 대장 신숭겸과 김락이 힘을 다하여 태조는 구해내었으나 정작 두 장군은 안타깝게 전사하고 맙니다.

이번 전투의 패배로 고려는 후백제의 견훤에게 완전히 압도당하고 마는데, 전쟁에서 진 것도 통탄할 일이지만, 개국공신이자 충신 신숭겸을 잃은 태조의 슬픔은 너무나 큰 것이었습니다.

태조는 그가 전사하자 몹시 슬퍼하며 장절(壯節)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삼중대광(三重大匡)에 태사(太師)로 추증하였습니다.

슬픔에 잠긴 왕건과는 달리 승전으로 기고만장한 견훤은 태조에게 서찰을 보내는데, 싸움의 결과를 들먹이며 태조를 조롱하다가 편지 말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덧붙입니다.

“내가 기도하는 바는 나의 화살을 서경(평양)의 다락 위에 걸며 나의 말에게 패강(대동강)의 물을 먹이는 데 있다” 한마디로 고려를 멸망시키겠다는 것이지요.

견훤의 서찰이 도착하기 전에 오월국(중국대륙의 五代拾國 중의 하나로 주로 상해지방을 차지하고 있던 국가)의 사신이 다녀갔는데 고려와 백제의 친선을 바란다는 오월국 왕의 편지를 전하러 온 것입니다.

이에 태조는 견훤의 사자에게 일단 화친의 맹약을 깨뜨리고 고려와 신라를 공격한 견훤의 무도함을 꾸짖고 나서, 오월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견훤에게 다시 화친을 제안하니, 고려와 후백제 간에 다시 화친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 두 나라 간에 충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몇 년 동안은 큰 전쟁 없이 평화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로부터 3년 후인 930년 고려와 후백제 간의 전세를 완전히 뒤바꿔놓은 고창 전투가 벌어지기까지, 태조는 공산 전투에서 패배하고 남은 전쟁 후유증을 치료하고 나라의 내실을 다지는데 진력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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