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

고려왕조실록 9 ㅡ 태조 8

이찬조 2021. 7. 10. 06:57
* 우리는 하나 그리고 귀순정책

재위 이듬해 태조는 송악 남쪽에 수도를 정하고 궁궐을 신축하여 나라의 기틀을 잡아가기 시작합니다. 즉위 3년째로 접어드는 920년 정월에는 신라가 사신을 보내와 신라와의 교류가 시작되고, 이어서 9월에는 후백제의 견훤도 아찬 공달을 사절로 보내면서 지리산의 대나무와 공작의 깃털로 만든 화살을 선물하는 등 삼국의 교류가 시작됩니다.

※ 아찬 벼슬 - 신라의 관직제로서 17등급 중 6등급에 해당하는 계급, 성골과 진골만이 5등급까지 오를 수 있었고, 개국시 참여한 족장이나 호족장은 6두품으로 아찬 벼슬이 종착지였음.
※ 성골 - 진골 - 6두품 - 5두품 - 3두품(평민)

민심과 국내 정치가 어느 정도 안정을 찾고, 위협적이었던 궁예의 잔존 세력도 정리가 되었으나 지방 호족들이 연합하여 중앙정부를 지원하는 형태로 정권을 유지하고 있는 미약한 태조 왕건은 자신의 지배기반을 다지고 삼한의 통일을 위하여 전쟁을 준비하게 됩니다. 상황을 반전 시키고 민심과 국론을 하나로 모으는 데는 전쟁이라는 수단이 가장 효과적이니까요.

그러나 태조 역시 즉위 초기인지라 나라의 내실을 다지는데 전력을 기울여야 하는 상황인데다가, 장차 전쟁을 치러야 할 상대들의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서는 일시적으로나마 상대국들과 교류를 하는 것이 필요하였기에 별다른 충돌을 일으키지 않고 평온을 유지하면서 탐색의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나 얼마간 유지되던 세 나라 사이의 평화는 견훤에 의해 깨지고 마는데, 견훤이 신라를 침공하여 대량(합천), 구사(경주변방), 진례군(군산)까지 밀고 들어 온 것입니다. 신라는 다급하여 고려에 원군을 청하게 되고, 고려는 구원 요청에 응하여 즉각 출병을 시키는데 이 소식을 접한 견훤은 바로 곧 철군을 하여 전쟁이 더 이상 확대 되지는 않고 잠잠해 지긴 하였지만 이후 고려와 후백제는 끊임없는 반목과 전쟁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태조는 송악과 함께 서경(평양)을 중요시하여 백성을 이주키고, 국가의 변방을 지키는 전진기지로 삼게 합니다.

당시는 남쪽의 후백제만 견제하면 되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북방민족의 침입을 막아 내면서 고구려의 고토를 회복해 나가려면 서경의 개척이 무엇보다 필요하였던 것입니다. 태조는 이러한 정책과 함께 민족 대통합의 길을 추진하여 갑니다.

921년 2월 말갈의 추장 고자리가 170여명을 데리고 귀순하였고, 4월에는 200여명이 들어오고, 922년에는 백제의 하지연(안동)의 장군 원봉, 명주(강릉)의 장군 순식이 항복하여 귀순하고, 925년에는 발해의 장군 신덕이 500여명을 이끌고 귀순하는 것을 시작으로, 거란에 의해 발해가 멸망하자 발해 사람들은 같은 민족이라는 생각에서 고려로 수 백명씩 밀려들어 오는데 태조는 이들 유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신라나 백제에서 귀순하여 오는 사람들에게도 집과 토지를 나누어 주는 등 융화정책을 활발하게 펼쳐 나갔습니다.

이렇듯 태조는 모든 사람을 품에 안고 화합의 정치를 펼치며 안으로는 삼한을 통일하고 밖으로는 북진정책을 추진할 기틀을 마련해 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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