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 25 - 광종 5
* 피를 부른 철권통치
집권과 함께 독자 연호를 사용하다가 후주가 중국 대륙을 장악하자 광종은 후주의 연호를 사용하게 됩니다.
그러나 960년 후주가 망하자 다시 독자 연호인 준풍(峻豊)을 사용하였고, 중국과 대등한 입장을 취하여 본인도 황제로 칭하고, 개성을 황도(皇都), 서경을 서도(西都)라 개칭하였습니다.
비록 962년 송에 의해 중국이 통일이 되면서 다시 송의 연호인 건덕을 사용하게 되었지만 광종은 고려황실의 위엄과 고려왕국의 자주성을 드높임으로써 군왕의 위엄을 내보이고자 한 것입니다.
이는 혹시 있을지 모를 호족들의 도전을 사전에 방지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입니다.
광종은 일부러 피를 보면서까지 자신의 정책을 밀고 나가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호족들이 워낙 강한 탓도 있었지만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내 백성들인데 불필요한 희생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평주 인근을 순행 중 박승위라는 자가 난을 일으키자 두려움을 느낀 광종은 이를 계기로 철권통치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아니, 사실은 때를 기다렸었는지도 모릅니다. 왕권에 도전하는 역모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한다면 본인 또한 선대왕들처럼 두려움 속에서 살다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공포감에 사로잡혀있을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통치 스타일을 바꾼 광종은 박승위 형제를 비롯한 역모에 관여 된 자들을 모조리 죽여 버립니다. 게다가 그들의 친가 처가의 9족까지 처형하는 본때를 보임으로서 공포감을 조성해 갑니다.
피는 또 피를 부르기 마련이어서 비슷한 사건이 터지거나 그러한 혐의가 있지 않을까 의심만 되는 상황이 되어도 가차 없이 피로 응징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효은태자와 혜종의 아들 흥화군, 정종의 아들 경춘원군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한때 자신에게 권력의 기반을 마련해주기도 하였던 박수경까지도 죽음으로 몰아넣어 버립니다.
이쯤 되자, 광종은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왕권을 강화하는데 조금이라도 거추장스럽다고 생각되면 닥치는 대로 없애버립니다. 이시기에 그토록 강성했던 호족세력들은 거의가 다 제거 되었습니다.
광종의 철권통치가 얼마나 철저하였는지는 이 기간에 희생된 사람이 무려 천여 명에 달한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을 보더라도 알 수가 있습니다.
왕권을 위하여 조선시대의 인간백정 태종 이방원이 자행했던 소위 주위 가지 쳐내기에 버금가는 살육전을 감행하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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