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

고려왕조실록 26 - 광종 6

이찬조 2021. 7. 17. 09:23

고려왕조실록 26 - 광종 6
* 절대왕권의 길이 열리다.

이제 광종의 절대 권력에 맞설 만한 세력은 고려에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광종은 의심을 거두지 못하고 주변 신하들과 지방호족들 심지어는 부인 대목왕후와 자신의 아들들에게까지도 경계심을 드러내곤 하였습니다.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누지 못한다더니 역시 권력에 한번 맛을 들이면 절대 내려놓기가 싫은 모양입니다.

아비가 아들을 경계하다? 사료에 세세하게 기록 된 바는 없으나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예측이 가능한 사실이 있습니다. 광종의 철권정치에 숨막혀 하던 호족들이 새로운 왕으로 바꿔치기하려는 음모가 있었을 가능성이 충분하였기 때문입니다. 반정의 주체세력은 단지 왕손들 중에서 차기 왕을 내세우기만 하면 명분이 서기 때문입니다. 혜종과 정종의 아들이 죽음을 맞이한 것 또한 이 같은 연장선상에서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광종은 참으로 외로운 군주이었던 것 같습니다. 조카들을 죽이고

하나 뿐인 자신의 아들마저도 경계를 해야 하였으니 말입니다.

광종은 두 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특이한 것은 두 명 모두 가까운 인척이라는 점입니다. 대목왕후 황보씨는 태조의 제4비 신정왕후 황보의 딸로 황주 호족가의 외손녀이고, 경화궁부인 임씨는 왕규가 왕요(정종)와 왕소(광종)의 반역을 참소하였을 때, 혜종이 이복동생들을 달랠 요량으로 왕소에게 시집보낸 딸입니다. 당시에는 왕가의 혼사에는 이처럼 정치적인 사유로 친족이나 인척간의 혼인이 흔히 있었던 일입니다. 단지 친남매만 아니면 허용되는 일이었습니다. 

예로서 신라의 김유신은 자기 여동생의 딸과 결혼을 했고, 진흥왕의 부인은 사촌 누나였습니다. 그러니까 광종은 이복남매와 결혼을 한 것입니다. 왕족끼리 근친결혼이 보편적인 일로 받아들여지다가 제25대 임금인 충렬왕 때 중국 원나라의 압력에 의해 공식적으로는 근친 결혼이 금지되긴 하였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이후 근친결혼이 완전히 금지된 것은 조선시대부터였습니다. 중국의 유교이념이 차츰 깊숙이 자리를 잡으면서 성(姓)과 본(本)이 같은 사람끼리의 혼인을 꺼리게 되었고 자연스레 국법으로 금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특이하게 생각되는 부분이 있는데 어찌하여 부친의 성씨와 딸들의 성씨가 다른가 하는 점입니다. 고대에는 성씨에 대한 체계가 없었고 복잡한 내력들이 있습니다. 사료에 의하면 나라에 공을 세우거나 임금에게 잘 보였을 경우 임금이 새로운 성씨를 하사하면 부친의 성씨가 바뀌는데, 이 경우 아들은 아버지의 성을 딸은 어머니의 성을 따랐던 경우도 있었고, 모친의 집안이 강력한 호족일 경우 자식들이 모친의 성씨를 사용하였거나, 

특히 당시에는 성씨가 없는 경우가 많았는데 부친이나 모친의 집안에 성씨가 있었던 경우 이를 따르는 경우 등, 당시에는 성씨의 결정에 모친이나 부친이나 어느 쪽을 따르던지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지들 맘대로였고 부친의 성씨를 따르라는 법도 없었습니다. 성씨에 관한 내력은 흥미 있는 내용이므로 추후에 별도로 기술하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다른 이야기를 기술하였는데, 이야기를 다시 광종의 치세로 돌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무튼 이러한 와중에서도 광종은 철권통치로 강퍅해진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하여 불교를 장려하고 대외적으로는 적극적이고도 시의적절한 외교를 펼쳐 고려의 위상을 드높였으며 거란과 여진을 적절히 조절해 가며 고려의 영토를 동북방면과 서북방면으로 넓혀갔습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라고 개혁을 추구한 군주는 후세에 엇갈리는 평가를 받게 되는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광종의 정책과 처신에 대하여 사가들의 찬사와 비난이 엇갈리는 것도 그가 강력한 개혁 군주였기 때문이 아닐까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 동안 호족들의 비위를 적당히 맞추면서 국가를 끌어가던 구조적 모순의 고려를, 새로운 통치 질서와 국가 체제의 기틀을 갖춘, 즉 중앙정부가 통치권을 행사하는 국가다운 국가로의 기초를 다진 왕이라는 사실입니다.

고려사에서는 광종의 사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올해 26년(975년) 여름 5월에 왕이 병들어 갑오 일에 정침에서 죽었다.

재위연수는 26년이요, 향수는 51세였다. 왕이 즉위 초에는 신하들을 예절로 대우하고 정사처리에 밝았으며, 빈궁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선비를 중히 여기며 밤낮으로 근면하여 정치가 잘 될 듯하더니, 중년 이후에는 참소를 듣고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였으며 불법을 혹심하게 믿었고 사치에 제한이 없었다.” 광종에 대해서 비교적 정확하게 기술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가 죽자, 시호를 대성(大成)으로 묘호는 광종(光宗)으로 하였습니다. 악산 북쪽기슭에 장사 지내니 능호는 ‘헌릉(憲陵)’입니다.



'고려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려왕조실록 28 -경종 2  (0) 2021.07.18
고려왕조실록 27 - 경종 1  (0) 2021.07.17
고려왕조실록 25 - 광종 5  (0) 2021.07.17
고려왕조실록 23 - 광종 3  (0) 2021.07.17
고려왕조실록 22 - 광종 2  (0) 2021.0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