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

고려왕조실록34 - 성종 5

이찬조 2021. 7. 20. 13:36
고려왕조실록34 - 성종 5
* 서희, 담판으로 강동 6주를 얻다.

국서를 가지고 거란의 영문에 도착한 서희는 먼저 통역에게 회견하는 절차를 알아오라고 하였습니다. 소손영은 거만하게 “내가 대국의 지체 높은 귀인의 신분이지만 모처럼 온 손님이니 내 친히 뜰 마당까지는 나가는 호의를 보이겠으나 고려의 화통사는 나에게 큰절을 올려야 하느니라.”

서희는 기가 막혔습니다.

“신하가 임금을 대할 때 당하에서 절을 하는 것은 예법에 있는 일이나 양국의 대신들이 대면하는 자리에서 어찌 그리 부당한 요구를 하는가.” 하고 답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소손영은 재차 삼차 절을 하라고 고집을 하지만 서희는 꿈쩍도 하지 않고 숙소로 들어가 버립니다. 내심 서희의 인품이 비범함을 알아본 소손영은 결국 당상에서 대등하게 대면하는 예식절차로 갈음하자며 한발 물러서게 됩니다. 그제야 서희는 소손영과의 담판을 시작합니다.

“당신의 나라는 옛 신라 땅에서 건국하였고 고구려의 옛 땅은 우리에게 소속이 되었는데 어찌하여 당신들이 침범을 하였는가? 또 우리나라와 국경이 연접하여 있으면서도 바다를 건너 송나라를 섬기는 까닭은 무엇인가? 땅을 떼어 바치고 국교를 회복한다면 무사하리라.” 소손영의 목소리는 엄중하였습니다.

그러나 서희는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고 그의 말을 맞받아쳤습니다.

“그러지 않다. 우리나라는 바로 고구려의 후계자이다. 그러므로 나라이름도 고려라 정하고 서경을 국도로 정하였다. 그리고 경계를 가지고 말하자면 귀국의 동경이 우리 국토 안에 들어와야 하는데 당신이 어찌 침범이라는 말을 할 수가 있겠는가. 또 압록강 안팎이 역시 우리 땅인데 이제 여진이 그 중간을 점하고 있으면서 간악한 태도로 교통을 차단하고 있는 마당이라 귀국과의 왕래는 바다를 건너기보다도 어려운 형편이다.

이는 여진의 탓이지 우리의 뜻이 아니다. 만약 여진을 구축하고 우리의 옛 땅을 회복하여 길을 통하게 된다면 어찌 국교를 통하지 않겠는가. 장군이 만약 나의 의견을 귀국의 임금에게 전달하기만 하면 어찌 접수하지 않으실 리가 있겠는가.”

서희가 이처럼 논리 정연하고 당당하게 논박하자 소손영은 강요하기 어렵겠다고 판단하고 자기나라 임금에게 보고하였습니다.

“고려의 의견을 받아들일까요? 아니면 일전을 하여 고려를 굴복시켜 버릴까요?”

거란 임금의 회답은 “고려의 요구를 들어주고 정전하라” 였습니다. 결국 땅을 빼앗으려고 전쟁을 일으켰다가 더 많은 땅을 붙여주게 된 셈이었습니다. 거란이 이렇게 해서라도 고려와 국경을 트고자 한 것은 송나라와의 관계 때문이었습니다. 송나라와 고려가 굳건히 결속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거란은 늘 쫓기는 입장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거란과 고려가 국교를 맺었으니 고려와 송의 사이가 소원해 지는 것은 뻔한 이치이고, 그리되면 거란은 한결 편안하게 송나라와 전쟁을 치를 수 있기 때문에 반대로 영토를 주면서까지 고려와의 관계를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윈윈작전이었지요. 이리하여 고려는 서희의 뛰어난 협상력으로 별다른 희생없이 강동의 6주를 공짜로 얻게 됩니다.

이후 고려는 거란의 연호를 사용하면서 외교관계를 유지하였고 송나라와의 관계 또한 은밀하게나마 이어갔습니다. 이처럼 실리 외교를 통하여 나라를 안정시키고 개혁정치를 펼처 나가던 성종은 997년 10월 16년간의 재위를 마치고, 자신의 조카이자 형 경종의 아들인 개룡군 왕손에게 왕위를 돌려주고서 향수 38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하게 됩니다. 4명의 왕후와 1명의 부인이 있었으나 자손을 보지는 못하였습니다. 혹시나 자신에게 아들이 있었다면 왕위가 바뀌었을 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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