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 47 - 문종 3
* 고려의 자존심, 불교와 유교의 융성
1055년 7월 초하루였습니다. 도병마사가 다음과 같은 장계를 올립니다.
“전날 압록강 지역을 우리 고려영토로 한다는 것을 거란에서도 인정을 한 바가 있으나 그들이 최근에는 압록강에 다리까지 가설하며 점차 옛날 경계선을 넘어오고 있고 오늘에 와서는 우정(郵亭)까지 설치하여 우리 영토를 침식하고 있으니 마땅한 조치를 취해야만 할 것으로 사료 되옵니다.”
이에, 예전 같으면 이러한 일로 사신을 보내면 거란 조정에서 군사를 일으켜 무력시위라도 할까 두려워 잠잠히 있었을 것이나 이번엔 달랐습니다.
문종은 비약적으로 강대해진 국력에 대한 자신감 때문인지 사신을 보내 옛 지역을 돌려주고 동시에 성벽, 보루, 궁구란자[弓口欄子 ; 돌이나 목책으로 올린 울타리], 정사 등 일체의 건축물과 시설들을 철거해 주기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국서를 받아본 거란 조정에서는 아무리 기다려도 이렇다 저렇다 하는 답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무력시위도 해오지 않았습니다. 고려의 국력이 날로 강성해지는 때인지라 잘못 건드렸다가 아무런 소득도 없이 창피만 당하는 결과를 당할까봐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이 상수라고 판단했을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기다리다 못한 문종은 1057년 4월 사신을 파견하여 궁구문 바깥에 있는 우정을 철거하고 고려의 북방 땅에 들어와 토지를 개간하고 가축을 증식시키는 등 실질적으로 고려의 영토를 점하고 있는 모든 거란 유민들을 철수시킬 것을 요구하는 단호한 조치를 취하게 됩니다. 예전 같으면 눈치나 보고 말만 무성하였을 터인데 이처럼 단호한 조치를 취할 수가 있을 정도로 자신감이 있었던 것입니다.
과거제를 통한 신진 관료들이 등장하고 여러 법제가 마련되어 중앙집권 체제가 안정 궤도에 접어들자 만조백관들과 양반사회 귀족층을 중심으로 유학을 배우고 생활화하려는 열풍이 불어 닥치게 됩니다. 문종으로서는 상층부 뿐만이 아니고 일반 백성들의 생활까지 두루 살펴야 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유교만이 비대해지고 그에 따라 관료들의 힘이 필요 이상으로 강성해지는 것을 경계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일반 백성들의 생활에는 불교가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었기에, 문종은 불교를 중심으로 민심을 통일시키고자 불교 융성책을 모색하기에 이릅니다 .
이러한 상황에서 시작된 것이 흥왕사의 창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유교에 심취한 관료들은 문종이 불교 육성을 위하여 전국 각지에 사찰을 건립하라는 명에 반기를 들고 일어납니다.
사원을 건립한다고 나라가 화평해지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사원을 증설하기 위해 동원되는 백성들의 부역과 세금으로 원성이 자자할 것이라는 이유에서입니다.
일면 타당성은 있어 보이나 문종은 자신의 뜻대로 흥왕사부터 창건을 밀고 나갑니다.
이처럼 문종 대에는 왕족과 귀족 그리고 상층부 관리들을 중심으로 유교의 발전을 가져왔고, 일반 백성들을 중심으로는 불교가 융성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1083년 7월, 37년간의 재위기간 동안에 고려시대에서 가장 찬란한 문화의 황금기를 이룩하였다고 평가받는 문종은 향년 64세를 일기로 다섯 명의 왕비에게서 얻은 10명의 아들들 중에서 제12대 순종, 제13대 선종, 제15대 숙종 이렇게 3명이 왕위에 오르는 기록을 남기고 세상을 하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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