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

고려왕조실록 52 - 헌종

이찬조 2021. 7. 28. 07:48

고려왕조실록 52 - 헌종

* 헌종의 등극 그리고 스스로 내준 왕위

 

덕종과 정종이 그러했고 선종이 그러했던 것처럼 왕의 소생이 없거나 어려서 국사를 관장할 능력이 없을 경우에는 그의 동생에게 왕위를 물려 주는 것이 전통처럼 굳어버린 시대였습니다.

 

선종이 재위 10년 7개월 만에 임종하자 조정의 대신들과 형제들과 왕의 형제들은 11세에 불과한 선종의 아들 욱 대신에 선종의 동생이자 문종의 셋째아들인 계림공 왕희가 대권을 이어 받을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종은 자신의 11살 밖에 되지 않은 어린 아들 욱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실수를 범하고 맙니다.

 

명군으로 일컬어졌던 선종이 이런 결정을 한 이유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왕욱은 선종과 두 번째 비 사숙태후 사이에서 1084년 6월에 태어났는데, 그는 어려서 소갈이라는 병(소위 소아당뇨병)에 걸린 상태였기 때문에 병석 생활이 잦았습니다. 때문에 그가 건강하게 오래 살 것이라 기대하는 신하나 종친들은 별로 없었습니다.

 

결국 병석에 누운 11살의 헌종 대신에 모후인 사숙태후가 대신 수렴첨정을 하게 되는데, 그녀는 자신이 거처하던 연화궁을 중화전으로 개칭하고 그곳에 영녕부를 설치하여 행정 및 군사를 포함한 일체의 정사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헌종은 병세가 좋아지기는커녕 날로 쇠약해져만 갔습니다. 이런 판국이니 나라가 조용할 리가 없었겠지요.

 

이러한 상황에서 중신 이자의가 자신의 누이동생으로 선종의 3비인 원신 궁주의 큰아들이자 헌종의 이복동생인 한산후 왕윤을 왕으로 세우려는 계획을 추진합니다.

 

이자의는 인주 이씨 가문의 수장 노릇을 하고 있었고, 중추원사에 왕의 숙부라는 지위로 왕도 어쩌지 못할 권력을 가졌으며, 사병을 양성할 정도로 재력도 막강했습니다. 그는 왕이 병들어 있는 틈을 타서 모반이 일어날 수 있으니 옥새는 왕윤이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나중에 다음의 왕인 숙종이 되는 선종의 아우인 계림공 왕희의 야심을 지목한 것이었습니다.

 

조정은 종친대표 계림공과 외척대표 이자의의 구도로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병석에 누운 11살짜리 왕은 이제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결국 1095년 이자의가 반란을 도모하자 계림공이 그를 척살하고 그의 일파를 제거하게 되자, 조정은 계림공 일파가 장악하게 되었고, 섭정하던 사숙태후와 헌종은 아무 실권도 없는 허수아비가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3개월 후 두려움 속에 헌종은 병을 이유로 계림공에게 양위를하고, 계림공은 숙종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계림공에게 양위하는 헌종의 양위 조서가 참 눈물겹네요.

 

“짐이 부왕의 유업을 받들어 외람되게도 보위에 올랐더니 나이가 어리고 몸도 허약하여 나라의 권신들을 옳게 통솔하지 못하였고 인민들의 기대에 보답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음모와 책동이 권력가들에게 걷잡을 수 없게 일어나며 역적 난신들이 대궐을 자주 침범하였다.

 

이는 다 내가 덕이 없는 까닭이다. 임금 노릇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늘 생각하고 있었다. 내 생각에는 나의 숙부 계림공에게로 대세가 기울어져서 신인들이 모두 그를 돕고 있는 듯하니 너희 대중들은 그를 받들어 국가의 위업을 맡게 하라. 짐은 뒷 궁궐 물러앉아 남은 생명이나 유지하겠다.”

 

이렇게 조서를 고치지도 않고 그냥 양위식에서 쓴 걸 보면 헌종은 정말로 껍데기 왕이었나 봅니다.

 

신하들 중에서 헌종 편에 선 인물은 아무도 없었던 것을 보면 목숨을 바친 신하라도 있었던 단종보다도 몇 배는 더 불쌍한 왕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상왕이 된지 얼마 후 1097년 11월 6일 에1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합니다. 소갈증 즉 소아당뇨 합병증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병석에만 누워있었으니 숙종의 입장에선 나중의 단종의 사례처럼 직접 조카의 목숨을 거두는 수고를 덜 수 있었던 셈이었습니다.

 

병약하고 어려서 사망했기 때문에 혼인은 하지 않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만 진주 소씨의 족보에 따르면 소계령(蘇繼笭)의 딸인 회순왕후 소씨(懷純王后 蘇氏)와 혼인했다고 하는데, 이건 소씨 족보를 제외한 어떤 사서에도 전혀 언급되지 않은 것을 보면, 조선시대의 다른 가문이 그랬던 것처럼 가문의 끗발을 높여볼 목적으로 소씨 문중이 족보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조작을 했을 가능성이 더 높은 것으로 판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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