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

고려왕조실록 51 선종 3

이찬조 2021. 7. 28. 07:47

고려왕조실록 51 선종 3

* 고려 외교의 중심에 서다.

 

종교적인 입장에서만 보면 불교와 유교는 분명 적대적인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라를 다스리는 선종의 입장에서 본 불교와 유교는 공히 부흥을 꾀하여야 할 대상들이었습니다. 불교는 민심을 안정시키고 모든 백성들의 심적 유대감을 유지해 나가는데 없어서는 안 될 대상이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유교는 그때 이미 고려의 정치를 이끌어가는 기본 토대를 이루고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선종은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유교와 불교가 균형을 이루며 발전하도록 배려를 하였습니다.

 

의천에 의해 불교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동안 국학에 공자의 가르침을 가르치는 등 유교의 발전에도 많은 공을 들인 결과, 공자의 가르침을 언행의 기본으로 삼았던 고려 사람들이 이제는 공자를 신적인 존재로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선왕들이 이루어 놓은 빛나는 업적 위에 불교와 유교의 발전이 이어지면서 나라의 상황이 더욱 튼튼해지자, 고려는 곧 동북아의 중심국가로 부상하게 됩니다. 고려사에서 확인이 되듯이 선종대에 이르러서는 눈에 띄게 늘어난 송과 거란, 여진, 일본과의 교류, 교역 기록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여진과 일본보다 국력이 우위에 있었던 고려는 그들을 부드럽게 포용하는 한편, 강경한 정책을 병행하기도하여 길을 들였고, 거란과 송에 대해서는 대등한 입장에서 상대에 걸 맞는 정책을 펼쳐 나갔습니다. 늘 영토분쟁을 겪던 거란에 대하여는 강경한 태도를 유지하며 나라의 이권을 챙기려 들었고, 문화 선진국 송으로부터는 앞선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교류를 확대해 나갔던 것입니다.

 

이중에서 특히 주목할 사안은 거란과의 외교 변화입니다. 물론 선왕대부터 고려는 거란에 대하여 제 목소리를 당당하게 낼 줄 아는 국가로 발전해 왔습니다. 그런데 선종대에 와서는 특히 유래를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로 강경한 자세를 견지하였으며 그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던 거란이 친히 사신을 보내 화친을 도모하였다는 점입니다.

 

동북아의 최강국가 거란, 고려는 이미 변방의 귀퉁이에 위치한 조그만 국가가 아니라 동북아 최강국과 전쟁을 불사할 만큼 모든 면에서 강력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늘 강대국의 눈치나 보면서 그들의 비위나 맞추며 눈치를 보며 사대외교로 일관하였던 우리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참으로 통쾌하고 자랑스러운 시대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이렇듯 폭넓은 외교와 힘을 바탕으로 한 자주적 통일국가를 이끌어 오던 선종이 과로로 병이 든 것은 1093년 3월이었습니다. 꺼지기 직전의 촛불이 마지막 불꽃을 보다 화려하게 태우고 사그러져 가듯이 잠시 쾌유하였던 선종은 이듬해 5월 병이 악화되어 승하하였으니 향수 46세에 재위기간 10년 7개월이었습니다.

 

세 명의 왕비와 4명의 아들 그리고 3명의 딸을 두고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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