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 75 - 명종 8
- 이의민의 독주.
경대승의 죽음은 무신들에게 짓눌린 삶을 살아온 명종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습니다. 임금을 살해한 자라하여 경대승이 위협을 가하곤 하였기에막강한 이의민마저 개경을 떠, 나 경주에 머물고 있었으므로 권력을 농단할 만한 무신들이 없는 틈에 왕권의 기틀을 다지고 이제라도 제대로 된 고려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명종은 이의민이 반란을 일으켜 자신을 폐위시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를 개경으로 불러올리는 후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이의민은 경주 사람으로, 그의 부친 이선(善)은 소금과 채를 파는 것이 직업이었고 모친은 연일현(延日縣), 옥령사(玉靈寺)의 여종이었습니다.
그는 비록 천민 출신이었으나 경주를 뿌리로 하고 있었고 뛰어난 리더쉽으로 신라 재건을 부르짖으며 군사력을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또한 스스로 욕심을 버리고 탐관오리를 쳐부수며 신라의 재건을 외치니 경주의 민심은 이의민 자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정황에서 주위 심복들은 개경에 올라가 고려를 멸하고 새로운 신라를 건설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니 출병하자고 성화를 해대지만, 이의민은 명종의 부름을 수락하고 개경에 입성하니 명종은 왕권회복의 기회를 스스로 차버린 꼴이었고, 이의민으로서는 호랑이 입에 저절로 날아 들어온 고기라고 표현해도 무리가 아닐 터였습니다.
소금장수의 아들에 불과했던 이이민이 개경에 도착하니 그를 위해 잔칫상이 떡하게 차려져 있는게 아닌가.
독단과 부정부패 온갖 만행을 마음껏 저질러도 상관없는 절대 권력이 그를 맞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힘 한번 안들이고 고려의 모든 권력을 장악한
이의민은 쏟아져 들어오는 뇌물과 아첨과 아부를 일삼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입이 귀에 걸렸고, 권력의 달콤함에 푹 빠져 토지를 강탈하거나, 양가처녀를 납치 겁탈하거나, 폭행과 살인을 멋대로 하는 등 완벽한 군주 위의 존재 그 자체였습니다.
이러한 세월이 13년이나 흘러가는 동안, 그는 어느덧 “왕손은 12대에서 끝나고 다시 십팔자(⍏八子 ; 李)가 나온다.”는 말을 믿게 됩니다. 왕이 되겠다는 참람한 뜻을 가슴에 품게 된 것이지요. 이때부터 그는 집에다 사당을 차려놓고 경주 일대에서 널리 믿던 두두리란 나무귀신을 밤낮으로 섬겼다고 합니다.
1193년 경주와 초전(울산)에서 김사미, 효심 등이 신라 부흥을 기치로 내걸고 반란을 일으키자, 이의민은 토벌군에 파견된 아들 이지순을 통해 은밀히 이들과 연결해 이들을 은밀하게 지원해 주면서 이들이 버틸 수 있도록 시간을 끌며, 기회를 엿보아 반란을 일으켜 왕을 제거하고 자신이 왕이 되고자하는 계획을 은밀하게 시행해 나갑니다.
그러나 이 계획은 토벌대에 파견된 아들 이지순이 김사미, 효심과 내통한 것이 발각되어 실패로 돌아가고 맙니다. 그러나 정작 이지순은 처벌받지 않았고, 총사령관인 전존걸이 고민하다가 자결하고 마는 해프닝으로 끝나고 맙니다.
난이 진압된 후에도 이의민 일가는 변함없이 고려를 장악한 채 탐학을 자행하였습니다. 다른 아들 이지영과 이지광도 아버지의 권세를 믿고 온갖 못된 짓들은 다 골라 했는데, 이 둘을 가리켜 쌍도자(雙刀子), 즉 쌍칼같이 흉폭한 아들이란 악명으로 불렀을 정도였습니다.
그런 와중에 하필이면 이지영이 최충수의 비둘기를 다짜고짜 뺏어가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고려사에는 워낙 기록이 간략하여 세부적인 정황을 알기 힘들긴 합니다만, 이지영이 최충수의 비둘기를 뺏었다는 기록과 이지영의 집에 최충수가 가서 비둘기를 돌려달라고 했는데 말투가 무례해서 이지영이 결박했다는 기록 등이 나옵니다.
무슨 비둘기였는지는 알기 힘들지만, 당시 무신들이 쓰던 연락용 비둘기가 아니었나 추측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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