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

고려왕조실록 71 - 명종 4

이찬조 2021. 8. 9. 07:04

고려왕조실록 71 - 명종 4

* 조위총의 반란

 

그러나 하늘 높은 줄 모르던 이의방의 몰락을 알리는 사건이 터졌으니 바로 서경유수 조위총이 1174년 일으킨 난이었습니다. 조위총은 무신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서경에서 군사를 일으킨 후 동계(東界: 함경도)와 북계(北界: 평안도)에 “개경의 중방(重房)에서 북계의 여러 성을 토벌하려고 군사를 발했으니 각각 병마(兵馬)를 규합해 서경으로 모여라.”는 격문을 돌려 선동을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절령(岊嶺, 또는 자비령으로 지금의 황해도 황주와 시흥 사이의 고개) 이북의 40여 성이 모두 호응해 무신정권에 반기를 들게 됩니다.

 

서경을 중심으로 일어난 반란에 대해 개경(개성)의 조정에서는 평장사 윤인첨을 원수로 삼아 3군을 거느리고 서경(평양)을 토벌하게 하는 한편 내시예부낭중(內侍禮部郎中) 최균을 동북로지휘사(東北路指揮使)로 삼아 여러 성을 찾아다니며 타이르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절령에서 윤인첨이 이끄는 관군은 때마침 부는 폭풍과 폭설 때문에 반란군에게 대패하여 반란군이 개경까지 육박할 정도였습니다. 포위된 윤인첨은 싸워 죽고자 했으나 도지병마사 정균의 만류로 겨우 포위망을 뚫고 개경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절령에서 승리한 반란군이 개경으로 쳐들어오자, 이의방이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반란군을 격파합니다. 그는 서경인 상서 윤인미, 대장군 김덕신, 장군 김석재 등을 비롯한 반군들은 귀천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목을 베어서 저자에 내걸었습니다.

 

이처럼 이의방의 군대는 승세를 타고 대동강까지 쫓아가 서경의 성 밖에 배수진을 치고 대치하지만, 때마침 닥친 혹독한 추위로 인하여 이의방의 군사들은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곧 철수하고 맙니다.

 

같은 해 11월 조정에서는 다시 윤인첨을 원수로, 두경승을 후군총관사로 삼아 서경을 총공격하게 하였습니다. 이런 와중에 출정 준비를 하던 이의방이 정중부의 아들 정균(鄭筠)의 명을 받은 승려 종감에 의해 살해되는 돌발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의방이 죽자, 명종은 전중감 유응규와 급사중(給事中) 사정유를 조위총에게 보내 이의방의 일파가 제거되었음을 알리고 반란군의 거사 명분이 약해지기를 기대했지만, 조위총 군의 기세는 여전했습니다.

 

그러자 윤인첨은 조위총의 심복들이 있는 연주(漣州, 평남 개천)를 공격하면 서경이 힘을 쓰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고 연주로 향하게 됩니다. 그러나 전황이 그다지 순조롭지 못하자, 명종은 사태의 마무리를 위하여 전중감 유응규와 급사중 사정유를 서경에 보내어 조서를 내려 타이르게 됩니다.

 

조위총이 항복하기를 기대하였으나 기대와는 달리 극렬하게 반발을 하자, 후군총관사 두경승은 연주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다음해 6월에 이르러 윤인첨이 군사를 서경으로 돌려 성을 포위하고 지구전을 펼치게 됩니다.

 

이리하여 완전히 포위가 되어 주변의 성과 연락이 두절된 조위총은 금나라에 원병을 청하러 김존심과 조규를 비밀리에 파견합니다. 그러나 김존심이 중도에서 조규를 살해해 버리고 조정에 항복해 버리자, 조위총은 다시 서언(徐彦)을 금나라에 보내 정중부, 이의방의 의종 시해사건을 알리고, 절령 이북의 40여 성을 바친다는 조건으로 원병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금나라에서는 조건을 수락하지 않고 도리어 서언을 잡아 고려로 압송해 버립니다.

 

그 뒤 서경에서 밀고 당기는 공방전을 1년여 동안 되풀이하다가 1176년(명종 6) 6월에 이르러서 윤인첨은 서경의 통양문(通陽門)을, 두경승은 대동문(大東門)을 양면에서 공격해 들어가, 드디어 서경을 함락시키고 조위총을 사로잡아 목을 베고 그의 수하 10여 명을 처형함으로서 조위총의 반란은 22개월 만에 평정이 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조위총이 죽은 뒤에도 서북민의 항거운동은 완전히 진정되질 않습니다. 서경이 함락될 때 도망한 장정(壯丁)들을 중심으로 1177년(명종 7)에 다시 봉기를 하지만 1년 6개월 만에 진압되고, 1179년(명종 9)에도 서북면지병마사 이부(李富)에 대한 불만으로 다시 봉기하는 등 서북민들은 조위총의 거병을 시작으로 끈질긴 항쟁을 계속하였습니다.

 

조위총의 난은 정중부와 이의방을 토벌한다는 대의명분이 뚜렷한 거병이었으나 외세를 끌어들이려 했던 점에서 주체적이지 못하였다는 점이 흠결이긴 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위총의 난은 무신 집권기간에 각처에서 일어난 민란을 유발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가 있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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