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

고려왕조실록 73 - 명종 6

이찬조 2021. 8. 9. 07:32

고려왕조실록 73 - 명종 6

* 망이, 망소이의 난.

 

그러나 신하가 정변을 일으켜 왕을 갈아치우고, 시해해버리고, 그들 사이에서도 암살이 거듭되는 권력 상층부의 혼란을 목격한 지방과 하층민들의 동요는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의방을 없애고 나서도 2년이 더 가서야 조위총의 난이 평정되자, 이번에는 공주의 천민 망이, 망소이가 반란을 일으킵니다.

 

1174년(명종 4)에 일어난 조위총의 난 등 서북계 지방의 민란을 ‘서적(西賊)’이라 하고, 남부지방의 민란을 ‘남적(南賊)’이라 하는데, 망이·망소이의 난은 남적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1176년(명종 6) 정월 공주 명학소에서 망이, 망소이가 무리를 모아 산행병마사(山行兵馬使)를 자칭하고 봉기해 공주를 함락시킵니다. 당시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던 정부는 우선 지후 채원부와 낭장 박강수를 보내 선유(宣諭)하였습니다. 그러나 난민들이 응하지 않음으로써 회유책은 실패하고 맙니다..

 

이어 대장군 정황재와 장군 장박인 등에게 3천명의 군사를 주어 난을 진압하도록 했지만, 난민에게 패배하고 맙니다. 다시 조정은 명학소를 충순현(忠順縣)으로 승격시켜 현령(縣令)과 현위(縣尉)를 파견하고, 난민을 위무(慰撫)하게 하는 등 회유책을 썼습니다.

 

이때에도 망이 등은 이에 응하지 않고 계속해서 예산현(禮山縣)을 공략해 감무(監務)를 살해하고 충주까지 점령하게 됩니다. 정부는 다시 대장군 정세유와 이부를 남적처치병마사(南賊處置兵馬使)로 삼아 대대적인 토벌을 전개하게 됩니다.

 

이것이 주효해 1177년 정월에는 망이, 망소이가 강화를 요청함으로써 난이 일단 진정되는 듯 하였습니다. 조정은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 생업에 돌아간다면 처형하지 않겠다는 약속과 함께 곡식을 주어 향리로 보내 주겠다고 회유하였습니다. 그러나 약속과는 달리 망이의 어머니와 아내를 인질로 삼고 다시 토벌을 감행하자 한 달 뒤에 망이, 망소이 등은 재차 봉기해 가야사(伽耶寺: 지금의 충청남도 예산 德山에 있음)를 침구했고, 3월에는 홍경원(弘慶院: 천안 稷山에 있었음)을 불태우고 개경까지 진격할 것임을 내세우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들은 아주(牙州: 지금의 牙山)를 함락시키고, 청주를 제외한 청주목(淸州牧) 관내의 모든 군현을 점령하였습니다. 이에 정부는 남적에 대해 강경책을 펼쳐, 같은 해 5월에 충순현에서 명학소로 강등시키고 군대를 파견해 이들을 토벌하게 됩니다.

 

그 결과 난민들은 큰 타격을 입게 되어 6월에는 망이가 사람을 보내어 항복을 청해왔고, 7월 망이, 망소이 등이 정세유에게 붙잡혀 청주옥(淸州獄)에 갇힘으로써 1년 반 동안의 반란이 완전히 진정되게 되었습니다.

 

망이, 망소이의 난은 특수행정구역인 소(所)에서 일어났다는 점에서 일반 농민반란과 구별할 수 있습니다. 망이, 망소이 등이 봉기한 원래 목적은 신량역천 [身良役賤]에 해당하는 소민(所民) 신분에서 탈피해 국가의 직접적이고 과도한 수취를 모면하려는 데 있었습니다.

 

※ 신량역천(身良役賤) ; 신분은 양인이었지만 누구나 기피하는 고된 역에 종사하는 부류로 양인과 천인의 중간 계층으로 취급되어 이와 같이 호칭

 

되었던 것인데, 본래 양인 신분이었던 자가 사회적 혼란기에 압량(壓良)·투속(投屬) 등의 방법으로 천인이 된 자가 많았습니다. 그들을 특수한 직임에 충당시켰는데 사재감수군(司宰監水軍)이 그 대표적 예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맡은 직임이 몹시 고되었으므로 천시되었고 이후 수군은 마침내 신량역천이라는 한 계층으로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밖에도 중앙 관서 및 종친·관리들에게 배속되어 수종(隨從)·호위·사령 등 잡역에 종사하는 조례(皂隷), 중앙의 사정 및 형사 업무를 맡은 관서에 소속되어 경찰·순라·옥지기 등 잡역에 종사하는 나장(羅將), 지방의 각 읍이나 역에 소속되어 사객(舍客)의 지대를 맡았던 일수(日守), 조운에 종사하는 조졸(漕卒), 봉수대 위에서 기거하며 후망과 봉수 업무를 수행하는 봉수군, 역에 소속되어 역역(驛役)을 세습적으로 부담하는 역졸(驛卒) 등도 신분은 분명히 양인이었지만 신량역천으로 되어『속대전』에 칠반천역으로 규정되었습니다.

 

그러나 명학소의 주민만으로 이 같은 대규모의 봉기가 가능했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난의 발발 초기에 공주 관아를 습격할 때부터 이미 주위의 일반 농민들도 적극 호응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따라서 망이·망소이의 난은 향, 소, 부곡민(鄕所部曲民)의 신분해방운동과 농민반란의 두 가지 성격이 결합된 것이라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난은 비록 실패했지만, 고려사회 신분질서를 타파하려는 신분 해방운동이라는 점에서 그 선구적인 의미가 인정되며, 실제로 이후 향, 소, 부곡 등 특수행정구역의 소멸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봅니다. 망이, 망소이의 난이 평정은 되었으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문란해진 상황에서 백성의 삶이 무너진 지 오래이었기 때문에 그 후로도 크고 작은 민란이 계속해서 일어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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