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

고려왕조실록 92 - 고종 7

이찬조 2021. 8. 17. 07:08

고려왕조실록 92 - 고종 7

- 몽고의 5차 침입.

 

 

수차례의 전쟁을 치르면서도 고려와 몽고 간에는 사신이 오가고 있었습니다. 요즈음도 국가간에 전쟁을 하는 와중에도 상호 간에 핫라인은 열어놓고 있듯이 당시에도 비상대화 채널은 항상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전쟁의 와중에도 1251년 11월에 몽고 사신 장곤과 홍고이가 40여명을 이끌고 와서 고종의 친조를 요구하였으며 이후에도 몽고는 몇차례 사신을 파견하여 개경 환도와 고종의 친조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는데 이는 그동안 최우가 내세운 대몽고 강경론에 기인한 바가 크다 하겠습니다.

 

그런 와중에 1249년 최우가 병사를 하게 되자 당시 최우의 아들 최항은 송광사에 출가하여 중이 되었는데, 그는 부친의 병환이 심상치 않음을 알고 환속하여 무신정권을 이어받게 됩니다. 무신정권의 주인은 바뀌었지만 고려의 대몽정책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이 최항 역시 대몽 강경책을 고수하고 있었습니다.

 

고려가 성을 겹겹으로 쌓아 전쟁에 대비하고, 고종이 육지로 나와 몽고에 귀순할 뜻이 전혀 없음을 간파한 몽고는 또다시 고려를 침공하니 이것이 제5차 몽고의 침공입니다. 이때 몽고군의 원수는 야굴이었는데, 그는 여러 차례에 결처히 고종에게 항복을 권하는 등 유화책을 펴나가는 한편 고주, 화주, 광주를 공략하여 살인과 방화를 일삼는 등 강경책을 병행하는 전술로 고려 조정을 압박해 나갑니다.

 

야굴이 강공유화책을 병행하면서 고려 조정에 요구한 사항들은 왕이 육지로 나와 항복 할 것. 성을 허물고 원나라(몽고)에 귀순할 것 등이었습니다. 고종은 거듭되는 몽고의 공격으로 여러 성들이 함락되고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자 결국 최항의 묵인 하에 육지로 나가 몽고의 신들을 맞아들입니다. 그리고 둘째 아들 인경공 창을 인질로 몽고로 보내는 조건으로 몽고군은 철군을 합니다.

 

그런데 몽고군은 이듬해 7월 또 고려로 쳐들어옵니다. 왕이 비록 육지로 나오기는 하였으나 진정한 개경환도가 아니니 개경으로 모든 수도의 기능을 옮기라는 요구였습니다. 전쟁 초기만 하더라도 몽고군의 일방적인 살육전이 진행되는 듯 싶었지만 고려의 별초군이 결사항전을 하자 몽고군도 주춤거리기 시작합니다. 몽고군에 잡혀간 남녀가 26만 6천 8백여명이요, 살육당한 자의 숫자 또한 그 이상일 정도로 고려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몽고군 또한 상당한 전력의 손실을 당하였습니다.

 

이처럼 피해가 날로 극심해지자 고종은 어쩔 수 없이 사신을 몽고에 보내 친조와 개경환도를 약속하고 철군을 요구하게 됩니다. 이리하여 몽고군은 물러갔으나 그 후 몽고에 약속한 사항들은 지켜지지를 않았습니다. 최항이 고집을 피우면서 굳건하게 버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신들은 한술 더 떠서 그간 몽고에 보내왔던 봄철 공납까지 중지해 버리자고 주장합니다.

몽고는 거의 해마다 침략을 해 오는데 우리가 아무리 정성껏 그들을 대접한다 한들 별로 득이 될 것이 없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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