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

고려왕조실록 103 - 충렬왕 4

이찬조 2021. 8. 26. 21:57

고려왕조실록 103 - 충렬왕 4

- 충렬왕의 몰락

 

 

1287년 원나라는 내안의 반란 사건으로 곤혹을 치른 바가 있었는데, 이때 고려에게 원군을 요구한 바도 있었습니다. 이 난은 곧 평정이 되었지만, 1290년 다시 내안군에 소속되어 있던 합단이 지금의 만주지역에서 다시 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러나 합단의 군사는 원의 장수 나만대에게 패하여 달아나다가 고려의 동북면으로 방향을 틀어 고려로 침입하여 오게 됩니다.

 

그동안 원나라의 간섭으로 날이 갈수록 자주적 색채를 잃고 약소국으로 전락해 가던 고려는 합단의 패잔병들에게 마저 대항하지 못하고 삽시간에 많은 땅을 빼앗기게 되고 충렬왕이 강화로 피신하는 상황까지 이르게 되자, 원나라가 1만 명의 원군을 파병하여 이를 진압하여 주지만 거의 1년 반에 걸친 합단의 침입으로 인한 피해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왜구 또한 수시로 침입해와 약탈을 일삼는 상황에서, 가면 갈수록 심해지는 원의 간섭 때문에 고려는 이제 희망이 보이지 않는 국가, 그저 형태만 유지하고 있는 국가 그 자체였습니다.

 

나라 안팎으로 어려운 상황이 이어지는데도 충렬왕은 오로지 사냥에만 집착을 하였고 정사를 돌보지 않으니, 나라꼴은 말이 아니었고 자연스레 아첨과 아부를 일삼으며 왕을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두르는 무리들이 때를 지어 나타나게 되고 나라 살림은 갈수록 더 어려워지는 형국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제국대장 공주와 세자 원(훗날 충선왕)은 임금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무척이나 애를 썼지만 그것이 통하지 않자 세자는 심하게 반발까지 하게 됩니다. 이런 와중에 충렬왕은 궁인 무비를 총애하여 더 큰 분란의 씨앗을 만들어 냅니다. 왕의 총애를 빌미로 무비는 안하무인으로 행동하여 제국대장 공주의 심사를 긁어 놓았던 것입니다.

 

1296년 11월 임진일 세자 왕원의 결혼식이 열립니다. 세자의 배필은 원나라 진왕 감마랄의 딸인 계국대장 공주였습니다. 아비에 이어 원나라의 사위가 된 세자(충선왕)는 고려의 왕위를 잇기 위한 수순을 차근차근 밟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듬해 5월 원에 머무르고 있던 세자에게 고려로부터 뜻밖의 비보가 날아듭니다. 다름 아닌 어머니 제국대장 공주가 병사하였다는 비보였던 것입니다. 

 

부고를 접한 세자는 귀국하자마자, 어머니의 죽음이 무비에게 있다고 덮어씌웁니다. 무비와 그 일당이 자신의 어미를 저주하여 죽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죄를 뒤집어씌운 뒤 세자는 무비를 비롯하여 그를 옹호하던 환관 등 40여명을 죽여 버리거나 귀양을 보내 버립니다.

 

그 시절 세자 충선왕은 아비 충렬왕과 반목의 골이 깊었습니다. 그랬기에 어머니의 죽음에 화가 난 나머지 부왕이 총애하던 무비에게 화풀이를 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세자는 늦게나마 부왕의 노여움을 풀어줄 필요를 느끼고는 진사 최문의 미망인 김씨를 부왕에게 바칩니다. 김씨의 자태와 용모가 워낙 출중하여 아비의 노여움이 어느 정도는 풀릴 것으로 기대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도 별 효과가 없었고, 아들의 행동거지를 보면서 정치에 환멸을 느낀 충렬왕은 1298년 정월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일선에서 물러나 버립니다.

 

이리하여 세자 원은 고려 제26대 왕으로 즉위하여 충선왕이 되지만 불행하게도 자신의 뜻을 정사에 반영해 보기도 전에 폐위되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충선왕이 조인규의 딸 조비를 가까이 한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는데, 계국대장 공주가 이를 투기하여 원나라에 알리자 조인규와 조비는 원나라로 압송되었고, 충선왕과 계국대장 공주 또한 소환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때 이들을 소환하기 위해 원나라에서 고려에 파견 나온 사신 패로올이 국왕의 인장을 회수하여 다시 충렬왕에게 건네주니 다시 충렬왕은 다시 왕위에 복귀하게 됩니다. 일국의 왕이 하루아침에 다시 뒤바뀌게 된 것이지요.

 

충렬왕은 다시 왕위에 복귀는 하였으나, 정사에는 무심하고 사냥과 음주가무에만 빠져드니 나라가 올바로 돌아갈 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승려 왕소유와 송린이 귀가 솔직한 제안을 하는데, 장차 왕위를 서흥우전에게 물려주고 며느리인 계국대장 공주를 그에게 개가 시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이런-- 아들이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 며느리를 남에게 시집을 보내겠다니--- 그것도 한때 자신의 뒤를 이어 왕의 자리에 있었던 아들의 정부인이자 왕비를 말입니다. 도대체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아들에 대한 증오심이 아무리 극심하였다고 하더라도 천륜에 반하는 행위를 하라는 자들이나 그것을 받아들인 아비라는 놈이나 매 한가지네요.

 

아무튼 이러한 복안을 성사시키기 위해 1305년 충렬왕은 왕소유와 송린 등을 대동하고 원나라를 방문합니다. 한데 당시 원나라에서는 왕의 후사가

없어 왕위 쟁탈전이 한창 벌어지고 있을 때였습니다. 

 

충선왕은 이때 평소에 가까이 지내던 무종을 도왔는데 무종이 승리하여 왕위에 오르게 되자 충선왕 역시 한창 끗발이 올라 있던 상황이었던지라 충렬왕은 목적한 바를 이루기는커녕 대동한 왕소유와 송린까지 충선왕에게 죽임을 당하고 본인은 모든 권한을 아들 충선왕에게 빼앗긴 채 홀로 고려로 돌아오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에 화병을 얻은 충렬왕은 1308년 기사일에 신효사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니 재위33년에 향년 73세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