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

고려왕조실록 110 - 충혜왕 1

이찬조 2021. 9. 1. 21:20

고려왕조실록 110 - 충혜왕 1

- 연산군이 형님이라 할 만한 폭군의 탄생

 

 

조선 천지를 피로 물들이며 주색과 방탕, 악정을 거듭한 끝에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한 연산군의 생애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연산군 못지않게 악행을 행하였던 인물이 고려시대에도 있었으니 그가 곧 고려 28대왕 충혜왕입니다.

 

일국의 왕으로 원나라에 끌려가 귀양살이를 떠나던 중 독살된 것으로 알려진 충혜왕. 그가 죽었다는 소식에 접한 고려 백성들은 그의 학정에 얼마나 신음하였던지 기뻐서 날뛰며 이제 다시 갱생의 날을 볼 수 있게 되었다고 소리소리 질러댈 정도였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남의 나라 땅에서 귀양살이를 하러 떠나던 중에 죽은 자신들의 왕을 비꼬는 노래가 백성들 사이에 유행을 했겠습니까.

 

만백성의 아버지라는 사람이 이렇듯 백성들에게 등 돌림을 당했으니 좁게는 왕 자신의 비극이요, 넓게는 고려의 비극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1315년 정월에 충숙왕과 명덕 태후 홍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충혜왕은 1344년 30세의 나이로 목숨을 잃고 맙니다. 그는 이름이 정, 몽고이름은 보탑실리이며, 1328년 정월에 세자에 책봉되어 원나라에 가서 숙위하던 중 충숙왕이 왕위를 물려주어 1330년 2월 고려 제28대 왕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그는 당시 원나라에 머물고 있었는데, 충숙왕으로부터 국왕의 인장을 회수하기위해 원나라 왕이 객성부사 칠십견(七十堅)을 고려에 파견한 동안도 평측문 밖에서 6일 동안이나 매사냥을 하였습니다. 성격이 호협하고 주색을 즐겨하였으며 놀이와 사냥에 탐혹하였고, 부화방탕하여 절도가 없었으며 남의 처첩이라도 곱게 생긴 아낙이 있다는 소문만 들으면 친소와 귀천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강간 간음하여 후궁으로 삼아 버렸다는 사실이 그의 행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즉위 당시 16세, 어린 나이를 감안해볼 때, 옳고 그름을 분간하기 어려워 당장 마음이 끌리는 대로 처신할 우려가 없지 않았습니다. 그는 일찍 세자로 책봉되지 못하여 한나라를 이끌어 갈만한 교육을 제대로 받지를 못한데다 성격까지 바르지 못하여 충혜왕의 즉위는 고려 백성의 절망과 피폐를 처음부터 예고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충혜왕은 즉위하자마자 국사를 대신들에게 분담하여 맡기고는 본인은 정작 원나라 우승상 연첩목아와 유림에서 매사냥을 즐겼습니다. 또한 항상 편애하던 신하들에게만 국사의 중책을 일임해 버리고는 날마다 내시들과 씨름판이나 벌리는 등 체면이나 상하의 구별이나 예절도 없이 희롱을 일삼았습니다. 이로 인해 정직한 사람은 배척당하고 주위에는 아첨이나 하는 간신배들만 그를 에워싸고 있으니 국사가 올바른 방향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충혜왕은 그해 330년 3월 무인일에 원나라 관서왕 초팔의 장녀와 결혼하게 되는데 그녀가 바로 덕녕 공주인데 관례에 따라 고려왕은 전 부인이 있던 없던지 간에 원나라 왕실의 여자를 부인으로 맞이하여야 하는데, 왕권을 단단히 다지고 실권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원나라의 지원 없이는 불가능하므로 반드시 거쳐야할 단계이었습니다.

 

충혜왕 역시 원나라 공주와의 혼인을 통해 날개를 단 샘은 되었지만 여전히 국사는 멀리하고 사냥에만 매달려 충숙왕으로부터 질책을 받곤 하였습니다.

 

수차례의 충숙왕의 질책에도 불구하고 원나라에 머물며, 한나라의 임금으로서의 신분에 맞지 않게 멋대로 행동하는 충혜왕을 보다 못한 원나라 조정이 충혜왕에게 고려로 돌아갈 것을 명하자 어쩔 수 없이 고려로 돌아오게 되는데, 그해 7월 무자일에 랑장 김천우가 원나라에서 돌아와 놀라운 소식을

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