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

고려왕조실록 114 - 충목왕

이찬조 2021. 10. 30. 06:39

고려왕조실록 114 - 충목왕

- 덕녕공주의 섭정, 어린왕의 죽음

 

온갖 악정이란 악정은 골라가며 해대던 충혜왕이 원나라로 압송되어 귀양길에 죽음을 맞이하자, 당시 충혜왕과 함께 원나라에 끌려가 머물고 있던 왕자 ‘흔’이 왕위를 잇게 되니, 그가 바로 고려 제29대 왕인 충목왕입니다. 충목왕은 이름은 ‘흔' 몽고이름은 ‘팔사마타아지’로, 선왕 충혜왕과 원나라 덕녕공주의 소생으로 장자로 태어났습니다.

 

1344년 2월 정미일, 고령보가 충목왕을 안고 원나라 왕을 만나러 갔습니다. 자질이 총명하고 지혜가 많은 아이로 소문난 충목왕을 가만히 바라보던 원나라 왕이 물었습니다.

 

“네가 장차 아비를 본받으려는가? 아님 어미를 본받으려는가?”

“어미를 본받으려 합니다.”

 

충목왕이 망설임 없이 대답하자 원나라 왕은 선한 것을 좋아하고 악한 것을 미워하는 충목왕의 성격에 감탄하여 고려의 왕위 계승을 승낙해주었는데 이때 충목왕의 나이 불과 8세에 불과하였습니다. 어리광이나 피울 나이임에도 부왕의 폐정을 익히 보아왔고, 특히 모친을 통하여 그 부당성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충목왕은 어머니를 본받겠다고 거리낌 없이 답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불과 8세에 불과한 어린 왕이 국사를 이끌어 간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모후 덕녕 공주의 섭정으로 그의 왕 노릇이 시작되었습니다.

원나라의 왕실 출신인 덕녕 공주가 정사를 일임하여 처리하게 되니 원나라에서도 한결 마음이 놓였을 것입니다.

 

덕녕 공주는 충혜왕에게 박해받던 채하중 등 충신들을 중용하고, 충혜왕의 충복이었던 신하들은 모두 섬으로 귀양을 보내는 등 조정을 일신하게 됩니다. 어린 왕이 성장하여 국사를 맡아 제대로 경영할 수 있을 때까지 섭정을 통하여 나라의 기틀을 다지고자 마음먹은 덕녕 공주는 우정승 채하중, 좌정승 한종유 등 수십 명의 신하들로 하여금 서연(書宴)을 열어 어린 충목왕의 글공부를 시독하게 하는 한편, 관리의 임명이나 인사행정을 관장하는 정방을 설치하여 인사와 인재의 등용에 공평성을 기하도록 합니다.

 

한편으로는 충혜왕이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 건축한 바 있는 신궁을 헐어 버리고 학문을 중시하는 분위기를 일으켜 세우기 위하여 숭문관을 설치하여 실록에 해당하는 편년강목을 편찬하도록 하는 등 국가의 기강을 바로 잡고 내실을 다지며 안정을 기해가면서, 백성들을 위무하고 구휼을 하는 데에도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1344년에는 권신들에게 탈취당한 녹과전을 빼앗아 주인들에게 돌려주었으며, 1348년에는 진휼도감을 설치하여 기아에 허덕이는 백성들을 구제하였습니다.

 

1347년에는 정치도감을 설치하였는데, 이는 원나라의 복속국으로 전락한 가운데 충혜왕의 거듭된 실정과 폭정으로 고려사회 전반에 팽배한 모순을 극복하고 사회체제를 바로 잡자는 목표를 가지고 설치한 기관이었습니다. 이에 계림군공 왕후를 비롯한 4명의 판사와 정연 등 33명의 속관을 임명하였는데 이들은 각도에 파견되어 토지를 재 측량하고, 지방권력자의 토지점탈 여부를 조사하였으며, 지방 관리의 탐오를 막고 규제함으로서 지방정치의 기강과 사회 분위기를 바로 잡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5월 무진일에 원나라 기황후의 족제(族弟) 기삼만이 남의 토지를 강탈한 사건과 관련하여 곤장을 맞고 옥에 갇혔다가 죽자, 개혁은 주춤하고 실효를 거두지 못하게 됩니다.

 

그동안 원나라에서도 고려의 사회개혁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하에 말없이 관심 속에 지켜보면서 성원만을 보내고 있었으나, 기황후의 동생이 죽는 일이 발생하자, 차츰 원의 간섭이 극심해지면서 개혁정책이 제대로 시행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어찌됐던지 덕녕 공주는 신하들의 도움 속에서 여러 방면에 걸쳐 국가의 기강을 바로 잡아 가는데, 불행히도 어린 충목왕은 병에 걸리고 맙니다.

충목왕은 덕녕 공주의 정성어린 간호에도 불구하고 재위 4년째인 1348년 12월에 운명하고 맙니다. 12세의 어린 나이에 아내도 자식도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