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

고려왕조실록 113 - 충혜왕 4

이찬조 2021. 10. 30. 06:37

고려왕조실록 113 - 충혜왕 4

- 기고만장 충혜왕 그리고 죽음

 

원나라로 압송된 충혜왕은 신하들과 힘께 심문을 받는 등 고초를 당하게 되지만 1340년 3월 탈탈대부의 도움으로 다시 고려왕으로 복귀하게 됩니다. 이는 당시 충혜왕 이외에는 고려를 이끌만한 인물에 대안이 없어서 그러한 결정이 내려진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찌 됐던 다시 고려로 돌아온 충혜왕은 한 나라의 왕으로서 체통에 말이 아닌 일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반성은커녕 예전보다 더 기고만장하여 정사는 내팽개친 채 사냥과 음주, 음탕한 행위를 일삼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항상 재물을 탐하여 백성의 토지와 노비를 강탈하고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백성들을 함부로 죽이는 등 임금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행위를 서슴치 않고 행하였습니다.

 

충혜왕이 행한 간음에 관한 행위를 기록에 의한 것만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341년 3월 초하루, 충혜왕은 예천군 권한공의 둘째 처 강씨가 미인이라는 소문을 듣고, 호군 이라적을 보내 궁중으로 데려오게 하였는데 이라적이 데려오던 도중 본인이 먼저 맛을 본 사실을 알고 강씨와 이라적을 때려죽여 버립니다.

 

그해 8월부터는 거의 날마다 사냥을 나갔는데, 겨울이 되어 눈이 너무 많이 쌓여 사냥이 힘들어지자 내시 전자유의 집에 가서 그의 처 이씨를 강간하였고, 전에 때려죽인 바 있는 이라적의 첩이 절색이라는 애기를 듣고 그녀를 찾아가 하룻밤 성적 노리개로 삼았고, 재상 배전의 집에 머무르며 그의 처와 그의 아우 금오의 처를 번갈아 강제로 침소에 들게 하는 등 그가 강간 간음한 여자들에 관한 기록은 이것들 외에도 많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관리나 내시들의 처첩에 대한 기록은 어느 정도 있으나 그 외에도 사냥 나갔을 때 고을에 머무를 일이 있으면 관리를 보내 고을관리의 부인이든, 처녀든, 남편이 있는 아낙이든, 과부든 신분을 따질 것도 없이 미모만 있으면 대려다 하룻밤을 보내게 하였으니, 그 수많은 음란 에 대해서는 일일이 기록되지 않은 사건이 훨씬 더 많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렇듯 본인은 무수한 여자들의 정절을 꺾어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충혜왕은 정작 강간 사건이 보고되기만 하면 무참히 죽여 버리거나 귀양을 보내버렸습니다. 만호 전찬이 만호공의 처를 범하자 형장을 처서 귀양을 보내버리고, 불량배 봉공 등 3명이 임금이라고 속이며 주부공보의 집에 들어가 그의 처를 강간한 사건이 발생하자 행성에서 잡아 죽이도록 하는 등, 그 외에도 강간에 관련된 자들을 돌로 눌러 죽이는 가혹한 처벌을 하였으니,

 

이는 똥 묻은 개가 재 묻은 개 나무라는 꼴이었습니다. 오죽하면 내시 현호도가 충혜왕을 독살해 버리려고 독약을 먹이려다 발각되어 처형되는 사건까지 일어났겠습니까.

그러나 충혜왕은 아름다운 여자가 있다는 소문만 들으면 쫓아가서 강간해버리거나 실패로 돌아가면 분풀이로 죽여 버리는 발피(망종)다운 행위를 계속합니다. 뿐만 아니라 빼앗은 포목 4000필을 출고하여 시장에 점포를 차렸으며, 민가를 헐어버리거나 재물을 강탈하여 궁내 재산에 속하게 하는 등 그 민폐는 이루 말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심지어는 충혜왕이 어린이들 수십 명을 잡아다가 새 대궐을 짓는 주춧돌 밑에 파묻으려 한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던 것을 보면 얼마나 그의 악행에 백성들이 공포와 두려움에 떨며 살아가야 했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흉포 무도하였던 충혜왕도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원나라 사신 원덕이었습니다. 당시 충혜왕은 새 대궐을 지으면서 공사장에 깃발을 꽂고 북을 울리면서 왕 자신이 몸소 담장에 올라 공사를 감독하고 있었습니다. 궁궐의 마지막 단청을 하는데 각 도에서 칠을 거두어 들였습니다. 여기에서 단청의 안료 수송이 기일에 늦는 자가 있으면 몇 곱의 베를 벌로 내도록 하였습니다.

 

1343년 원나라에서 오던 사신 실덕이 길거리에 붙은 방을 보고 크게 노하였습니다.

“나무와 돌을 기한 전에 바치지 않는 자는 베를 징수하거나 섬으로 귀양 보낸다”농사가 한창인 시절에 이렇듯 백성들을 동원하여 부역을 시키는 현실을 목격한 실덕은 원나라 왕에게 이를 보고하려 합니다. 이에 충혜왕은 채하중을 친히 보내 원나라 왕에게 보고하지 말아 줄 것을 간청하였습니다. 아무리 부마국이라 하지만 그래도 한나라의 왕일지언데 일개 사신에게 비굴하게 간청을 하며 선처를 구한 것입니다.

탈탈대부의 도움으로 충혜왕이 고려로 돌아 왔을 때 원나라에서는 고려출신 기씨가 원나라의 제2 왕후가 되었습니다. 바로 그 유명한 기황후입니다.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권세를 누리는 자가 있었으니 바로 기씨의 오빠 기철이었습니다.

기철은 1343년 8월 충혜왕의 폐정을 보다 못하여 충혜왕의 탐욕과 음탕한 행동 때문에 신음하는 고려 백성들의 생활을 안착시켜 줄 것을 원나라에 요청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원나라에서는 하늘에 제사를 지낼 것과 대사령을 반포할 것을 구실로 사신 6명을 보내게 되는데, 그때가 그해 11월 이었습니다. 충혜왕은 병을 핑계로 사신들을 맞으러 나가지 않으려 하였는데 원의 사신 고륭보가 다음과 같이 꾀어냅니다.

“우리 황제가 고려왕이 불경하다고 항상 말씀하셨는데 만일 마중 나오지 않는다면 황제의 의심이 더 클 것이다”

 

이런 말을 듣자 충혜왕은 어쩔 수 없이 백관들을 거느린 채 원나라 사신들을 영접하러 나갔습니다. 그러나 원나라 사신들은 다짜고짜로 충혜왕을 발로 차며 포박하여 버립니다. 결국 폐정을 거듭하다 원나라로 끌려간 충혜왕은 연경에서 2만 리나 떨어진 계양현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는데 계양에 미처 닿기도 전에 도중 악양현에서 싸늘한 시체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왕이 독살 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하였지만 이 소식을 들은 고려 백성들은 그저 충혜왕이 죽었다는 사실에 기뻐 날뛰었다 합니다.

 

충혜왕의 재위는 6년간이었고 3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만 것입니다.

[출처] 고려왕조실록(113) 충혜왕 4 |작성자 kabsoonhw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