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

고려왕조실록 115 - 충정왕 1

이찬조 2021. 10. 30. 06:40

고려왕조실록 115 - 충정왕 1

- 비극의 시작

 

 

1348년 12월 어린 충목왕이 죽자, 덕녕 공주는 원나라에 충목왕의 죽음을 보고하고 새로운 고려왕의 책봉에 대한 표문을 원나라 왕에게 전달하였습니다. 그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충목왕이 병으로 인하여 세상을 떠났다. 온 나라가 애통해 할 뿐만이 아니라 왕의 나이가 어리어 후손이 없다. 우리나라는 아직 귀순하지 않은 일본과 이웃하고 있기 때문에 하루라도 임금이 없으면 안 될 것이다. 이제 왕기(공민왕)는 보탑실리왕(충혜왕)의 동복 아우로서 이전부터 귀국에 가서 입시하고 있었던바 있었으며 나이 19세이며, 왕저(충정왕)는 충혜왕의 서자로서 현재 본국에 있는바 나이 12세이다.

 

이런 일의 결정은 당신의 마음에 달렸으니 우리 백성의 소원을 참작하여 특별한 명령을 내려 끊어진 왕대를 계승하게 하고 또 명령을 받들어 변방을 안정시킬 수 있게 하여주면 임금 생각하는 근심을 잊어버리고 더욱더 근왕하는 충절을 지키지 않겠는가?’

 

위의 표문에서 알 수가 있듯이 당시의 고려의 왕위를 이을 만한 인물은 훗날 고려 제31대왕이 된 공민왕 왕기와 제30대 왕으로 등극한 왕저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고려의 내부에서는 왕저의 어린 나이를 들어 왕기의 등극을 바라는 이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최종 낙점은 원나라 왕의 몫이었음으로 고려에서는 그저 표문을 올리고 결과를 받아들이는 도리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1349년 2원 충혜왕의 서자 왕저를 입조시키라는 조서를 가지고 전지 도첨의사 최유가 고려로 돌아옵니다. 이는 왕저를 고려 제30대 왕으로 책봉하겠다는 원나라 왕의 뜻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원나라 왕으로부터 왕저에게 고려의 왕위를 이을 것을 명령받고 그해 7월에 고려로 귀환하여 강녕전에서 왕위 즉위식을 치르게 되니, 그가 바로 고려 제 30대왕 충정왕입니다. 그러나 당시 12세에 불과 하였던 충정왕은 어수선하기 그지없는 국내 상황과 왜구들의 발호라는 외적인 요인을 헤쳐 나갈만한 능력을 갖추고 있지를 못했습니다. 그 때문에 왕위에 오른 지 2년여 만에 폐위된 채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공민왕에 의해 독살 당하고 맙니다.

 

고려 500년 역사 전체를 놓고 보면 충정왕의 비극적인 죽음 한가지만을 놓고 보면 별게 아닐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비참한 노릇이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는 하지만 만약 충정왕 대신에 공민왕이 먼저 왕위에 올랐다면, 아니 꼭 그렇지 않더라도 어린 왕을 주변에서 잘 보살펴 국정을 이끌어갈 수 있도록 보필해 주었더라면, 다른 사람도 아닌 작은 아버지에게 독살을 당하는 비참한 최후만은 면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왕위에 오른 충정왕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간략하게 정리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충정왕은 충혜왕의 둘째 아들이자 희비 윤씨의 소생으로 충목왕의 이복 동생입니다. 이름은 저, 몽고이름은 ‘미사감타아지’ 인데 1338년에 태어나 1349년에 즉위하게 됩니다.

 

그의 어머니 희비 윤씨는 찬성 윤계정의 딸로 충정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왕의 측근세력과 파평 윤씨 외척들의 비호 속에 힘을 키워 나갑니다. 그러나 원나라 왕실 출신인 덕녕 공주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두 여인 사이에 권력다툼이 벌어지게 되자 고려의 정국은 더욱더 어려워집니다.

 

당시 충정왕의 즉위에 많은 노력을 한바 있는 외척 윤신우가 윤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권세를 누리며 그 측근들과 함께 정국을 어지럽히고 있었고, 덕녕 공주의 총애를 받고 있는 배전 등이 또한 비행을 일삼는 등 고려의 내부 상황은 혼탁하기 이를 데가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