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

고려왕조실록 120 - 공민왕 4

이찬조 2021. 10. 30. 06:46

고려왕조실록 120 - 공민왕 4

- 김용과 최유의 반란

 

 

1361년 10월 홍건적의 평장 반성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다시 고려를 침입해 들어옵니다. 홍건적이 파죽지세로 개경까지 함락해 버리자 공민왕은 안동으로 몽진을 떠나게 되고, 홍건적은 도처에서 불을 지르고 식량을 약탈하는 등 만행을 저지르고는 개경의 궁궐을 불 태워 버리는 등 그야말로 10만명의 무리가 온 강토를 초토화 시켜 버립니다.

 

그러나 이듬해 전열을 가다듬은 고려군이 20만 대군을 동원하여 총공세를 펴 홍건적을 북으로 밀어내기 시작하자, 그렇지 않아도 군세 면에서 불리

 

했던 홍건적은 압록강 건너로 도주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이성계가 홍건적의 괴수 사류와 관선생의 목을 베는 전과를 올리니 이는 새로운 스타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홍건적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총병관 정세운이 공을 세우자 평상시 사이가 좋지 않았던 김용은 이를 시기하여 음모를 꾸몄습니다. 즉 왕의 명령이라고 거짓말을 하며 몰래 부하 장수 안우와 이방실, 김득배에게 지시하여 정세운을 죽여 버리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김용은 이에 그치지 않고 안우 등이 정세운을 살해했다는 죄목을 뒤집어씌워 그들을 처형해 버립니다. 글자 그대로 토사구팽...

 

이렇듯 큰일을 저지르고 나자 김용은 내심 불안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홍건적의 방화로 파괴된 궁궐 보수공사를 하는 동안 흥왕사 행궁에 머물던 공민왕마저 시해 해버리려는 음모를 꾸미고는 1363년 3월 초하루 밤에 도당 50여명을 비밀스럽게 침투시켜 행궁을 침범합니다. 변란이 생기자 겁에 질린 호위 군사들은 모두 달아나버리고 안도적, 왕지 등을 비롯한 장수 수명 역시 살해되고 맙니다. 공민왕은 안도적이 기지를 발휘하여 대신 죽는 바람에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가 있었습니다.

 

이렇듯 공민왕 시해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위기에 몰린 김용은 반란에 동원된 수하들을 전부 죽여 버리고, 자신은 난이 진압된 뒤에는 일등공신이 되어 권세를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변란의 전모가 들통이 나게 되어 김용는 밀성으로 유배되었다가 계림으로 옮겨진 뒤 처형되고 맙니다.

 

한편 원나라에 머물던 최유는 기황우가 자신의 일족을 숙청한 것에 대하여 원한을 품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는 공민왕을 폐위한 뒤 역시 원에 머물고 있던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세우라며 아첨을 떨어댑니다. 이에 기황후는 군사 1만명을 주어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공격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최유는 이성계가 이끄는 군대에 대패하여 원나라로 도망치고 맙니다. 그 후 고려로 압송된 최유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됩니다.

 

거듭된 외적의 침입과 조일신, 김용, 최유로 이어지는 내부 분란을 겪으면서 심신이 피곤해진 공민왕은 1365년 노국공주가 산고를 이기지 못하고 사망하자 실의에 빠진 나머지 모든 권한을 신돈에게 넘겨주고 무기력한 임금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공민왕의 어머니 명덕 태후와 이제현 등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신돈의 득세를 염려하는 가운데 공민왕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신돈은 1366년

 

5월 정민도감을 설치하여 부당하게 빼앗긴 백성의 땅을 되돌려 주게 하고 억울하게 노비가 된 자들을 원래의 신분으로 회복시키는 등 개혁에 박차를 가하게 됩니다.

 

이에 따라 신돈은 백성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게 되지만 반대로 개혁의 대상으로 몰린 권문세가들에게서는 격렬한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