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 121 - 공민왕 5
- 신돈의 죽음과 공민왕 시해사건
공민왕은 권문세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돈에게 주변의 어떤 모함이 있더라도 버리지 않겠다는 맹세각서를 써서 인감도장으로 날인하고 공증사무소에서 공증까지 마친 보증서를 주면서 개혁의 전권을 신돈에게 부여하였는데, 개혁의 내용이 당시로서는 너무나 파격적이었기에 그만큼 사대부들의 저항 또한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신돈은 거침없는 강력한 개혁 드라이브로 백성들로부터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됩니다. 몇 해 동안 그의 사심 없는 강력한 개혁정책을 통해 고려의 미래는 밝아지는 듯 했으나, 곧 신돈은 과도한 대중적 인기와 권력에 취해 방자해지고 미망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초반에서 소개한 바도 있습니다만, 신돈은 세속 권력에 맛이 들자 가끔 곡차(신돈이 처음 명명했다는 설이 있음)라는 명분으로 음주를 즐기고, 여자를 불러들이곤 하다 보니 승려사회 내부에서 왕에게 진소하였다고도 하고, 또 다른 일설에 의하면 신돈의 개혁에 피해를 본 권문세력들이 몰락한 사대부 집안의 과부를 꽃뱀으로 고용하여 추문을 일으켜 제거되게 만들었다고도 하는데,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일이 있겠습니까? 아무튼 아까운 인재 하나가 여자 문제로 처형당했다는 야설이 나왔다는 자체가 안타까운 일이라 하겠습니다.
아무튼 신돈의 영향력이 너무 비대해지자 급기야는 공민왕마저 신돈을 경계하게 되고, 공증까지 마친 맹세각서에도 불구하고, 결국 1371년 7월 역모의 누명을 쓰고 불법구속 4일 만에 정식 재판도 없이 참형으로 죽임을 당하고 마는데, 이는 신돈의 대중적 인기를 두려워하고 질투한 공민왕의 자작극으로 보는 사학자들이 많습니다.
신돈의 목을 치자 새파란 피가 솟구쳤다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로 그의 죽음을 억울함으로 미화하고 있는 야사도 있는 걸 보면 아무튼 신돈이 큰 인물이었음에는 틀림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노국공주가 죽은 뒤로도 그녀에 대한 집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여색을 멀리하며 비정상적인 행동을 거듭하던 공민왕에게는 후사가 없었습니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노국공주 사후에는 여자를 아예 찾지를 않았다고 하니 꽃을 봐야 꿀을 따지요.
이제현의 딸 혜비 이씨를 비롯한 여럿 후궁들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공민왕은 그녀들을 멀리하고 명문자제들로 구성된 자제위와 동성애를 즐기고, 심지어는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후궁들을 겁탈하게 하는 등 별별 해괴한 변태 짓을 일삼는 등 기행에 빠져 지냈습니다.
그로인해 익비 한씨가 자제위와 관계하여 임신하게 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런 사실을 내관 최만생으로부터 보고받은 공민왕은 술에 취해 최내관에게 침방일지를 가져오게 하여 그 후궁과 관계한 자제위들의 명단을 확인하고는 잠자리에 들면서 "내일아침 날이 밝으면 그년과 관계된 이놈들을 모조리 죽이고 그년이 낳은 자식은 내 자식으로 해야겠다.
참, 최내관 너도 이 사실을 알고 있으니 너도 죽어야겠지?" 라는 말을 농담처럼 하고 잠이 들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최만생은 이래죽으나 저래죽으나 마찬가지라 생각하고 그날 밤 자신과 함께 죽을 운명인 꽃미남들과 결탁하여 쥐가 고양이를 무는 격의 거사를 일으켜, 공민왕을 살해 해버리니,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내관에 의한 국왕시해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때 왕 시해사건을 총괄하여 마무리한 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당시 시중을 맡고 있던 권문세족의 대표자인 이인임으로 이 사건 이후 그는 무소불위의 강력한 권력을 쥐게 됩니다.
이리하여 공민왕은 1474년 9월 갑신일에 내관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마는 운명을 맞게 되는데 이때가 그의 나이 45세, 재위기간은 23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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