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

고려왕조실록 118 - 공민왕 2

이찬조 2021. 10. 30. 06:43

고려왕조실록 118 - 공민왕 2

- 개혁에 박차를 가하다.

 

공민왕이 귀국하여 맨 처음 개혁의 손을 댄 곳은 정방이었습니다. 무신정권 시절 최우가 설치한 정방은 인물을 심사하여 적당한 자리에 배치하는 임무를 담당하였으나 권신들이 인사권을 마음대로 행사하는 등 그 폐단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공민왕은 정방을 폐지함으로서 권신세력을 배척하였으며 정치개혁을 원활하게 시행하기 위하여 문무 관리들의 배치 권한을 전리사와 군부사에 귀속시켰습니다.

 

이어 곧바로 죄수를 용서할 것에 대한 교서를 내렸는데 이 교서의 내용을 보면 공민왕의 개혁의지를 분명하게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는 먼저 퇴폐화 되어가는 풍속을 지적하면서 조정 관리들의 근무자세 쇄신과 서연(書演)에 나올 신하들의 선택방법, 그리고 토지와 노비에 관한 여러 문제들을 약자의 입장에 서서 처리할 것과 뇌물을 받은 탐관오리의 처벌 문제에 대해서 다루고 있었습니다.

 

공민왕의 이러한 개혁의지는 이후 구체적으로 가시화가 되는데 공민왕은 먼저 자신이 직접 세세한 곳까지 장악하고 1352년 다음과 같은 교지를 내립니다.

 

‘옛날 임금들이 일심전력으로 나라를 다스릴 때 그 나라를 보존하려면 반드시 친히 국가의 정무를 봄으로서 자기의 견문도 넓히고 하부의 실정도 알게 되었다. 지금 나도 역시 그렇게 하려 한다. 첨의사, 감찰사, 전법사, 개성부, 선군 도관은 모든 판결 송사에 대하여 5일에 한 번씩 계주하라’ 즉 각 기관들은 주요 업무를 5일에 한 번씩 글로 작성하여 올리라는 명령이었습니다.

 

또한 같은 달 기미일에 서연을 열고 영천부원군 이능간을 비롯한 10여명의 대신들로 하여금 날을 바꾸어 가며 시독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정치토론을 이끌어내어 정사를 바르게 펼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공민왕은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려 자신의 개혁 의지를 강력하게 표출합니다.

 

‘원로와 대신과 사대부들이 교대로 들어와 경서와 사기 그리고 예법에 관한 말들을 가의하며 권세 있는 집안에서 토지와 가옥 그리고 노비를 강탈하여 여러 해 동안 송사하고 있는 사건들과 무고한 죄로 오래 동안 옥에 갇혀있는 사건들을 판결하여 처리하라. 참의사와 감찰사는 나의 귀와 눈이다.

 

현행 정치의 옳고 그릇됨과 민간의 이해관계에 대하여 기탄없이 바로 말하라!’

 

이렇듯 개혁의 분위기가 날로 익어가는 가운데 9월 무자일에 대호군 성사달이 옥에 갇히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일찍이 정방에 있으면서 40여명에게서 사사로이 관직을 주었던 비리가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사달 사건을 계기로 차츰 공민왕의 개혁정책에 반기를 들고 나서는 무리가 생겨났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조일신과 그 도당들이었습니다.

 

조일신은 공민왕 즉위 후 연저수종 공신에 책록이 되어 관삼사로 있으면서 자신의 권세를 이용하여 부당한 행위를 많이 저질렀고 대간을 탄압하며 파당을 지어 정권을 전횡한 죄로 지목을 당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자신의 몰락이 코앞에 닥쳤다는 것을 인지한 그는 1352년 9월 그를 따르는 무리를 규합하고 사병을 일으켜 왕궁을 포위해 들어가 당직 관료들을 살해하고 곧바로 왕이 기거하는 이궁으로 침입하여 숙위 관원들과 군사들을 참살해 버리고나서, 공민왕을 협박하여 자신이 우정승 자리를 차지합니다. 이와 함께 정천기 이권 등을 각각 좌정승과 관삼사로 삼았으며 그를 따르는 무리들에게도 관직을 두루 내렸습니다.

 

그리고는 이틀 뒤 자신이 주도한 반란을 그를 따르는 도당들의 책임으로 돌리고는 자신은 화를 피해가기 위해 주동 공모하였던 최화상과 여러 추종자들을 반란죄로 죽여 버립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을 얻은 듯 방자하게 행동하던 조일신은 난을 일으킨 지 엿세 만에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공민왕이 자신의 심복들을 시켜 조일신을 제거해 버린 것입니다.

 

조일신 일당의 난을 평정한 공민왕은 다시 개혁에 박차를 가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