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

고려왕조실록 119 - 공민왕 3

이찬조 2021. 10. 30. 06:45

고려왕조실록 119 - 공민왕 3

- 심화되는 고려와 원의 갈등.

 

 

원의 내부사정과 주변 국가들의 정세를 살피면서 원나라에 빼앗겼던 국권을 되찾고 강력한 배척운동을 전개하기로 마음먹은 공민왕은 1352년 소위 몽고풍이라고 일컬었던 변방, 호복 착용 등과 같은 몽고에서 전례 된 의식을 모두 폐지해 버리고 1356년에는 원의 연호까지 폐지하며 관제마저 문종 시대의 제도로 바꿔버립니다. 

 

뿐만이 아니라 고려조정을 간섭하기위해 원나라에서 설립한 정동행중소성이문소와 쌍성총관부를 폐지해 버리고, 원나라 기항후의 오빠 기철 일당을 숙청함으로서 원의 추종 세력들에게 칼을 들이대기 시작합니다. 또한 원나라에 내어준 북쪽의 영토를 되찾는 등 고려의 자주권과 자존심을 한껏 드높였습니다.

 

고려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던 원나라는 1356년 6월 80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려를 토벌하겠다고 을러댑니다.

이에 공민왕은 서북면병마사 인당에게 응원군을 보내 원의 침입에 대비하는 한편 남경에 궁궐을 신축할 것을 계획합니다. 원나라와의 결사항전을 각오하고 있었기에 수도를 남경으로 옮겨 원의 침략에 철저하게 대비코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원나라가 아무리 국운이 기울어져간다 하더라도 당시 동북아를 좌지우지하는 강국임에는 틀림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모를 리가 없는 공민왕은 1356년 7월 서북면 병마사 인당의 목을 베고 원나라에 표문을 보내기에 이릅니다. 내용 중 일부를 살펴보면 공민왕이 원의 공격을 피하기 위하여 인당에게 모든 죄를 덮어 씌웠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간악한 자들이 왕래하면서 실제 정형을 왜곡하지나 않을까 염려하여 요소들에 군사를 두어 수비케 하였으나 관리와 군인들이 강을 건너 군사행동을 한 것은 사실이나 나의 본의가 아니었다. 그 죄인을 심의하고 고려의 국법에 의해 처단하였으니 하늘과 땅 같이 넓은 인자한 마음으로 당신의 노여움을 풀어주기를 바란다.’

 

이렇듯 원의 공격을 피해나가기 위해 공민왕은 자신이 임무를 맡긴 장수를 희생시키는 고육지책을 쓰면서도 고려에서 빼앗아 가져간 땅을 자유롭게 출입하게 해달라는 원나라의 요구에는 고려의 땅이라는 점을 들며 거절하여 버립니다. 원나라의 입장에서는 당장 대군을 동원하여 고려를 쓸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원나라의 주변에는 고려보다도 훨씬 위협적인 적들이 도사리고 있었으니, 하북성에서 세를 일으킨 홍건적이 그즈음 국호를 송이라 일컬으며 하난성과 살사성, 요동지역을 점령한 채 원나라에 위협을 가해오고 있는 상황인지라 원의 입장에서는 당장 대군을 일으켜 고려를 깔아 뭉겔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1359년 12월, 그즈음 기세 좋게 요동지역까지 점령하고 원을 위협하던 홍건적이 원나라의 공격에 쫓겨 고려로 밀려들어 옵니다. 고려 북방을 초토화 하면서 밀려 내려오던 홍건적은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함락시키고 다음날 정주를 초토화 시키면서 기세를 몰아 안주까지 차지하더니 서경을 함락 시키며 기세를 한껏 올립니다. 이에 고려는 2만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서경을 탈환하고 압록강 북방으로 홍건적을 쫓아내 버립니다. 

 

그러나 홍건적은 전열을 정비하여 다시 배를 몰고 서해도 쪽으로 들어와 성을 불 지르고 약탈을 자행하였습니다.

관군이 이들을 물리치기는 하였으나 홍건적의 침입으로 민심이 흉흉해진 데다가 전라도와 경상도에 큰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고초는 더욱 심했으며, 왜구들이 강화와 고성, 울주, 거제 등지에 출몰하여 약탈과 방화, 부녀자를 강간하는 만행을 저질러대니 그해 고려의 민심은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공민왕은 홍건적의 침입과 왜구의 행패에 적잖이 놀라, 원나라와의 관계 복구의 필요성을 느끼고 1361년 9월 경신일 호부상서 주사층을 원나라에 보내 다음과 같은 표문을 전하게 합니다.

‘우리는 다만 귀국 조정의 보호만을 믿고 있었는데 뜻밖에 강포한 도적의 침노를 받게 되자 우리가 단독으로 응전하여 다행히 당신이 미워하는 자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육로와 수로가 다 막혀 귀국과의 음신이 통하지 못하였으니 비유하건데 말이 주인을 그리워하여 길게 울고, 학이 중천에서 울어도 듣기 어려운 것과 같았다. 이번에 나의 사신이 멀고 긴 길을 밤낮으로 달려가서 당신과의 관계를 다시 새롭게 하게 되니 마치 기갈이나 풀린 듯이 기쁘기 그지없다.’

 

공민왕은 이튿날 이미 폐지해버린 바 있는 정동성을 다시 설치하고 관리들을 배치하였습니다. 이는 배원정책의 포기와 원의 간섭기 때의 관제로 복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