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

고려왕조실록 126 - 창왕 2

이찬조 2021. 10. 30. 06:51

고려왕조실록 126 - 창왕 2

- 이성계의 부상과 창왕의 죽음

 

바야흐로 세상의 모든 힘은 이성계에게로 몰리고 있었습니다.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에 진출해 있는 신진 사대부들이 이성계를 든든하게 받쳐주며 세상을 뒤바꿀 원대한 꿈을 키워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위기를 느낀 이색은 1389년 판문하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을 때 창왕의 명나라 입조를 꾀합니다. 우선 창왕을 피신시키고 볼 요량이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고려에 대한 명나라의 태도는 명나라 왕이 이색에게 내린 교서에서 알 수 있듯이 고려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고려는 중국과의 사이에 산이 막히고 바다가 놓여 있으며 풍속 또한 판이하다. 그리고 중국과 서로 통하였어도 이합이 무상하였다. 오늘에 신하가 선왕을 쫓아내고 그의 자식을 왕이라 세워 놓고 조근하러 오겠다고 청한다. 이것은 인륜 상도의 큰 변고로서 임금이 자기 도리를 못하였으므로 신하도 또한 신하로서 못할 대역(반역)을 감행한 것이다. 온 사자를 되돌려 보내고 동자도 조근하러 올 필요가 없다고 전하노라. 세우는 것도 저희들이 할 일이요, 폐위 시키는 것도 저희 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우리 중국은 너희들 일에 상관하지 않겠다.”

 

어찌 보면 다소 왜곡된 면이 없지 않아 보이는 내용이지만, 어이되었던지 창왕의 입조와 고려에 대한 감시를 청하여 이성계의 세력을 억제해 보려고 했던 이색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귀국의 길에 오릅니다. 이일을 계기로 이색마저 유배를 당하고 마니 창왕은 그야말로 사면초가의 신세가 되고, 반대로 이성계는 왕위의 왕(上王)과 같은 위치에 서게 됩니다.

 

당시 우왕은 황려부(여주)에 유배되어 있었습니다. 1389년 11월 어느 날 최영의 생질이 김저와 최영의 족당이었던 정득후가 우왕을 은밀하게 찾았습니다. 이때 우왕은 검 한 자루를 전하며 검을 곽충부에게 전하여 이번 팔관회 날을 기하여 동지들을 규합하여 이성계를 제거하라고 지시합니다. 그러나 이를 전해들은 곽충부는 거짓으로 거사에 참여 할 것처럼 말해 놓고는 바로 이성계에게 달려가 이를 일러 바쳐버립니다.

 

음모를 이미 알고 있는 이성계는 팔관 소회에 참가하지 않고 집에서만 머무르고 나오지를 않자 김저와 정득후는 이성계의 집을 찾아갑니다. 스스로

사지로 걸어들어 간 것입니다. 이성계의 측근들이 우루루 몰려나와 이들을 붙잡자 정득후는 스스로 목에 칼을 찌러 자결하고 김저는 혹독한 고문을 당하게 됩니다. 고문에 못이긴 김저는 연루자들을 모두 실토하게 되니 변안렬을 비롯한 6명의 주모자들은 모조리 참수되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성계는 창왕을 폐위시키고 죽여 버리기로 마음먹게 됩니다. 우왕과 창왕이 왕씨가 아니고 신씨라는 이유를 내걸고 있으나, 이는 이미 이성계가 왕위를 노리고 있었음은 모두가 주지하는 바와 같습니다.

 

그리하여 그해 12월 강화에 유배되어있던 왕에게는 정당문학 서균형을, 강화에 유배되어 있던 창왕에게는 대제학 유순을 보내 어린왕의 생명을 끊어 버리니 창왕은 재위 1년5개월에 불과 10살의 나이였습니다. 어린 나이다 보니 소생도 부인도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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