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

고려왕조실록 125 - 창왕 1

이찬조 2021. 10. 30. 06:50

고려왕조실록 125 - 창왕 1

- 아버지는 유배 길로

 

고려 제33대 왕 창왕은 1380년 8월 음축일 우왕과 이림의 딸 근비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창왕 역시 역성혁명의 주역들로부터 아버지 우왕과 마찬가지로 본디 왕씨가 아닌 신씨라는 고의적인 의혹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나이 9살에 즉위하여 10살에 유배지에서 죽임 당하고만 비운의 왕입니다.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 세력에 의해 우왕이 강화도로 유배를 갔을 때 창왕은 나이 9살에 불과한 철부지 아이에 불과 하였습니다.  이성계와 그 측근들은 창왕의 왕위 승계를 원치 않았습니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의 아비를 유배시키고 장차 죽여야 하는 상황인데 그를 왕위에 올린다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이치에 맞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혹시나 왕권이 강화되어 창왕이 이성계와 그 일당들을 제거 하고자 한다면 꼼짝없이 당하고 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우려를 떨쳐 낼 수가 없었기에 이성계와 그 일당은 왕실의 인물 중 적당한 자를 골라 왕위에 올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인임이 자신을 좌군 통제사로 천거해 준 은혜를 잊지 않고 있었던 조민수였습니다. 그런데 이인임은 우왕이 즉위하게 될 수 있도록 한 결정적인 인물이 아니던가. 결국 창왕을 지지하는 것이 이인임에게 은혜를 갚는 길이라고 생각한 조민수는 당대의 명망이 높은 유학자 이색의 도움을 받아 창왕을 고려 제33대왕으로 옹립하게 됩니다. 이색은 “전왕의 아들을 왕으로 세우는 것이 합당합니다.” 라는 한마디로 반대파의 반발을 잠재워 버립니다.

 

이성계 일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민수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창왕은 이제 오로지 조민수의 얼굴만 바라보고 모든 국사에 그의 허락만을 기다리는 신세였습니다. 이러한 결과를 살펴보면 이성계의 무리만큼은 아니라할지라도 조민수에게도 어느 정도의 세력은 있었음을 예상할 수가 있고, 반대로 이성계의 세력이 아직은 국사를 마음대로 쥐고 흔들 만큼 그 세력이 성장하지 못한 단계였다고 판단할 수 있겠습니다.

 

아무튼 조민수와 이색에 의해 왕위에 오른 창왕은 그들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의 몰락은 곧 자신의 몰락과도 같은 의미였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우왕 역시 이성계 무리에 의해 폐위되어 유배 길에 오르지 않았던가...

 

그런데 1388년 6월 갑자기 이성계가 병을 이유로 사직을 하게 됩니다. 비록 사직서가 처리는 되질 않았지만, 왕을 옹립한 조민수와 이색이 주도하고 있는 정사에서 잠시 떠나 있으려고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 한발자국 물러나서 관망한 다음 기회가 오면 한 번에 내리치겠다는 이었습니다. 

 

이때만 해도 창왕의 바램은 어느 정도 이루어지는가 싶었습니다. 그러나 회군세력이 개혁을 단행하는 과정에서 전제개혁을 주장하자 이를 반대하던 조민수가 그만 이성계 세력의 조준에게 탄핵을 당하고 맙니다. 이로 인해 조민수가 창녕으로 유배되자 이색은 동지가 없어지니 처지가 외롭게 되었고 창왕 역시 궁지에 몰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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